우리나라는 ‘자살 공화국’이라 불릴 정도로 2016년에 13년간 연속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습니다(2017년에 2위가 되기도 했었지만, 2018년에 다시 1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극단적 선택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부분 경제적인 이유로 ‘돈’과 연관이 많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가난한 나라일까요? 미국에서도 한미방위비 협상에서 분담금을 올리려는 이유를 ‘한국은 부자나라다’가 아닙니까? 그러나 대부분 국민은 우리나라를 부자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019년 국제통화기금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일 인당 국내 총생산은 3만 불이 넘습니다. 이는 세계 27위에 해당하지요. 여기에 한국의 국내 총생산(GDP)은 1조 6422억 달러로 OECD 회원국 중 10위에 해당합니다.
분명 과거보다 엄청나게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가난하다는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긴 좋은 집에 살고, 비싼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골프를 치러 다니면서도 “힘들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됩니다.
‘돈’이라는 물질에서 벗어날 때 행복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이 기준이 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고 말할 때도 그 이유가 ‘돈’으로 인한 아픔에서 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용서는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일흔일곱이라는 수는 모든 세대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여기에는 한 세대도 빠지지 않으므로, 십자가 안에서 주어진 하느님의 용서라는 충만한 선물을 받지 못한 세대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도 서로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용서를 이처럼 여러 번 하라는 것은 분노할 시간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로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매정한 종의 비유에 나오는 매정한 종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용서하지 못하는 종이 아닌, 어떻게든 용서할 수 있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많은 용서를 계속해서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상의 기준이 되는 돈과 같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서 자유로운 우리가 될 때, 하느님의 기준을 가지고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집회서 저자의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집회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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