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이 실수로 회사 동료의 바지에 콜라를 쏟았습니다. 너무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어떻게 해요? 엉덩이까지 홀딱 젖었어요.”라고 말하자 회사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괜찮아요. 엉덩이가 조금 더 달콤해졌을 뿐이에요.”
바지에 콜라를 쏟은 사람은 이 회사 동료를 앞으로 어떻게 볼까요? 이제까지 보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보였을 것입니다. 만약 자기 바지에 콜라를 쏟았다고 화를 낸다면 좋은 감정을 갖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화내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도 유머로 넘기는 모습에서 좋은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며칠 전, 성지를 방문하신 자매님으로부터 자기 본당에 찾아온 손님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강론하시는데 본당 신부님을 계속 칭찬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순간 누가 다르게 보였을까요? 칭찬의 대상인 본당 신부님이 아니라, 칭찬하는 손님 신부님이었습니다.
상대방이 다르게 보일 때는, 지금 자신을 높이려고 할 때가 아닙니다. 또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려고 할 때도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좋고 선한 일을 행할 때였습니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때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모습이 다르게 보였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특히 좋은 모습으로 보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좋고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분명 나의 이웃들에게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서로 정반대인 두 아들의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두 아들에게 일렀는데, 맏아들은 싫다고 했다가 생각을 바꿔서 일하러 갑니다. 반면 또 다른 아들은 가겠다고 했지만 가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라고 물으십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행하는 것이 그것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하고서 이행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일하러 가지 않겠다고 하고서 나중에 생각을 바꾼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했습니다. 일하러 가겠다고 하고서 가지 않은 아들은 꾸지람을 듣습니다.
이처럼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세리와 창녀들이 믿은 뒤에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어떤 변명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은 그들에게가 아니라 너희에게 먼저 왔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았다. 그들은 거부하지 않고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깨닫지 못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지금 당장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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