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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28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0-09-28 조회수 : 319

서울 대학교 병원에서 스트레스에 관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연구진은 같은 환경에서 양육된 실험용 쥐를 두 집단으로 나눠서 한 집단에는 2분마다 전기 충격을 주고, 또 다른 집단은 유리창 건너편에서 맞은 편 고통 받는 쥐를 관찰하도록 배치했습니다.

열여섯 시간 동안 실험을 진행하며 쥐들은 480회의 전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탈진한 쥐는 전기 충격을 받은 쥐가 아니라 이 고통을 관찰할 수밖에 없었던 쥐였다고 합니다. 유리창 너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느꼈고,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더 큰 무력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보다 고통을 바라보는 사람의 아픔이 더 큽니다. 그런데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은 그 사실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오랜 병으로 힘들어하는 환자와 그 가족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고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합니다. 그렇다면 이 고통을 이겨낼 힘은 무엇일까요?

함께 하는 것입니다. 고통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하는 마음보다는 ‘나만 아니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과연 마음이 편안할까요? 더 큰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육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사람인가를 두고 다투는 제자들의 생각을 아십니다. 사실 다투게 되면 절대로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그 다툼의 이유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더욱더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위대한 의사답게 어린아이를 그들 앞에 본보기로 세우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어린이까지 받아들여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눈높이를 낮춰야지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린이의 행동과 어린이의 말을 따라 하게 되지요. 어린이 앞에서는 세상의 체면이나 명예가 별 소용이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낮춰서 함께 하는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은 ‘혼자’가 아닙니다. 자신을 낮춰서 누구든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지금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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