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도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자비임을 말씀하신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을 당신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대하신다. 그러나 복음에서는 더 나아가 임금의 관대한 초대에 대한 초대받은 사람들의 태도를 묘사한다. 즉 임금의 초대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구원을 포기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이 비유는 루가복음(14,16-24)에도 전해지나 차이점이 있다. 루가복음에서는 어떤 사람이 준비한 ‘잔치’에 대해서만 말하지만, 마태오복음은 ‘아들’의 혼인잔치를 마련하는 ‘임금’에 대해 말하고 있다. 루가에는 초대할 때 종들을 한 번만 보내고 있지만 마태오는 두 번 보낸다. 또한 마태오는 자기의 군대를 보내 그 ‘살인자들’이 살고 있던 ‘동네’를 파괴시키는 ‘임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동네가 불길에 휩싸였다면(7절 참조) 어떻게 길거리에서(8절 참조) 한가로운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문맥상으로는 혼란스럽지만 어떤 ‘역사적 사실’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 ‘동네’의 불은 예루살렘 멸망을 암시하며, 그것은 임금의 ‘초대’를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종들을 ‘잡아 죽이거나’ 학대를 가한(6절) 행위에 대한 벌로서 해석한다. 여기서의 ‘종들’은 구약의 예언자들과 예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파견하신 사도들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대되어 첫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자칭 올바르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세리와 창녀들”(마태 21,31)과 특히 이방인들이다.
그러나 초대를 받고 그 잔칫상에 앉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주님의 집의 식탁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복음이 요구하는 ‘행동적’ 요구에도 응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쫓겨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사람은 침묵을 지키고(12절)있다는 것은 자기 잘못을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혼인예복’이란 무슨 의미인가? 이에 대한 답은 잔치의 식탁에 “악한 사람 선한 사람”(10절) 모두 모였다는 데서 발견된다. 그는 나쁜 사람의 부류에 속할 것이며, 이는 좋은 씨앗 가운데서 가라지가 번성하는 교회의 신비를 말한다.
‘초대받은 것’만으로는 ‘구원받기에’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14절). 이는 신앙에의 ‘불림’이 곧 ‘구원’을 결정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시는”(1티모 2,4) 하느님의 은총에 인간은 최대한 협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혼인예복’은 하느님 나라의 결실로 제시되었던 삶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구체적인 정의를 뜻하는 것이다. 아무런 결실을 내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처럼 꺾여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결실’을 내야할 의무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크면 클수록 더 무거울 것이다.
즉 루가복음에서처럼 단순한 잔치가 아니라, ‘예복’까지도 요구하는 “아들의 혼인잔치”(2절)의 초대라는 하느님의 보다 큰 ‘사랑’에 관한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시면서 보여주신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의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2독서: 필립 4,12-14.19-20: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사도 바오로는 필립비인들이 베풀어준 경제적 도움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자신의 사도적 사명이 어떤 외적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한다. 사도직의 결실은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한 신뢰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다른 모든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겪는 환난에 여러분이 동참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13-14.19절).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사랑의 ‘결실’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신자들이 이루는 결실이다. 그들은 그들의 스승을 큰사랑으로 보살펴준다. 또 하나는 바오로 사도가 이루는 결실로 신자들의 사랑에 감사하면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되이 자신을 적응시켜 나감으로써 자신의 사도적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가 하느님의 집에, 그 아들의 잔치에 초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에 합당한 응답으로서 행동적인 결실을 맺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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