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대기를 하고 있었던 차가 있었습니다. 이 차는 신호가 빨리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지요. 급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앞으로 갈 수 있는 파란 신호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건널목에 어느 어르신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어르신이라 빠르게 뛰어서 지나갈 수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호등이 바뀌었으니 보행자가 있어도 상관없이 앞으로 내달리면 될까요? 아닙니다. 보행자가 안전할 때까지 지나간 뒤에야 신호대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통법규는 자동차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기본 정신은 사랑입니다. 율법 그 자체가 아닙니다. 사람보다 율법이 위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라고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사랑보다, 즉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위에 올라갈 법규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원칙이 더 위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보지 않고 율법을 먼저 봤던 과거의 종교지도자들처럼 말입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이 율법을 가지고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랑을 맨 위에 올려놓지 않는 사람은,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두려워할 분은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라고 하시지요. 그분께서 제일 강조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과 뜻을 같이하며, 삶도 죽음도 겁내지 않은 아브라함 같은 선조들의 신앙을 본받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굳게 믿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을 수 있을 때,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우리가 큰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별 것 아닌 것으로 취급되는 참새 한 마리도 잊지 않으시는 분이며,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보살핌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며, 이로써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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