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 있는데 성지의 기념성당 홀 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커다란 울음소리. 맞습니다. 어린아이가 이 홀에서 뛰어놀다가 넘어진 것입니다. 그것도 큰 소리가 날 장도로 꽈당 넘어졌습니다. 그 소리에 놀라 얼른 이 홀로 나가보니 한 아이가 울고 있었고, 그 옆에서 아빠가 넘어져 부딪힌 아이의 무릎을 만져주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괜찮아. 이 정도로는 안 아파.”
그 소리의 크기로 볼 때, 안 아플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아빠는 아프지 않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아빠는 아프지 않습니다. 아빠가 넘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당사자인 이 아이는 너무나 아팠을 것입니다.
물론 아이 아빠는 아이의 고통을 잊게끔 하려고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이런 모습이 참 많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대의 아픔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뭘 그렇게 호들갑이야?’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아픔에 공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는 남의 아픔만이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아픔도 공감할 수 있을 때, ‘나’를 제대로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삶은 곧 공감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라고 표현합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군중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즉, 그만큼 사랑한다는 표시였습니다. 당신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수확을 아무리 해도 열매의 풍성함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주시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수확할 일꾼이 필요합니다.
수확할 일꾼이 단순히 성직자, 수도자에 해당할까요? 아니면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분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들 역시 수확할 일꾼이지만, 이는 좁은 의미에서 주님의 일꾼입니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뜻에 맞춰서 자신의 삶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주님의 일꾼이 됩니다.
일꾼을 보내달라는 주님의 청은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우리 모두를 위해, 우리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