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가 어려운 순간이 다가오면 “왜?”라는 질문을 합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지?” 식으로 계속해서 “왜(Why)?”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답은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정의를 의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왜(Why)?”가 아니라, “어떻게(How)?”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예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채칼 하나를 선물을 받았습니다. 채칼은 매우 날카로워서 아주 단단한 것도 상관없이 잘 썰렸습니다. 그런데 저의 부주의함으로 손가락 끝이 채칼에 썰린 것입니다. 곧바로 피가 솟구쳤습니다. 이때 저는 어떤 질문을 해야 했을까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도, ‘왜 채칼에 베이었지? 도대체 이유가 뭐야?’라면서 채칼을 이리저리 살펴봐야 할까요? 아니지요. ‘피가 많이 나는데 어떻게 해야지?’라면서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왜(Why)?”만 외친다면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답은 “어떻게(How)?”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더 긍정적이며 희망적인 답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요한의 출생 예고 뒤를 이어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나옵니다. 이 장면에도 천사 가브리엘을 등장시키는데,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느님의 힘이 인간 역사 안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모님의 예수님 잉태로 하느님의 힘이 드러나서 구원의 새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모님으로부터 태어난 아기는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며, 세상을 다시 창조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했습니다.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성모님께 예수님 잉태의 소식은 당황스럽게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성모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처럼 불신의 마음으로 의심하지 않습니다. 매우 놀라셨겠지만, 의심의 목소리로 “왜(Why)?”라는 질문이 아닌, “어떻게(How)?”라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즉,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역시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일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힘이 우리 곁에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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