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고쳐 쓸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많은 이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언제부터인가 인터넷상에서 유행하는 신조어이지만, 이 말을 많이 쓰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고쳐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평범한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켰고 세상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습니다.
고쳐지길 바라는 그 사람의 변화를 간절히 원한다면 먼저 믿어줘야 합니다.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먼저 하기에 그 생각대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단 한 사람도 고쳐지지 않았다면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까지 너무 많은 사람이 고쳐졌고 세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고쳐 쓰시기 위해서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이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제자들을 부르실 때 반드시 “나를 따라라.”라고 구체적으로 부르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자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시지요. 그들이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묻자, “와서 보아라.”하십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와서 보아라”라는 주님 말씀을 듣고 보면서 주님의 뜻을 본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직접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셔야 따를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 곁으로 가서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흐름에 젖어서 세속적으로 살 뿐입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보면,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 성령의 성전입니다(1코린 6,15.19 참조). 그래서 우리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1코린 6,20 참조). 그러나 너무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불가능하다는 생각, 변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 그러면서도 멈추지 않는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에 우리는 주님께 제대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우리를 고쳐 쓰시기 위한 주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 곁으로 우리가 먼저 가야 합니다. 그래야 고쳐 쓸 수 없을 것 같은 내가 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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