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주선하여 자기의 두 제자와 예수를 만나게 해주는 장면과 안드레아가 주선하여 베드로를 예수님과 만나게 하는 장면으로 되어있다. 이 두 장면의 공통점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직접 우리 자신에게 다가오시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하느님의 부르심은 일반적으로 우리 형제들의 증언을 거쳐 온다는 것이다.
복음에 보면,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갔던 정확한 시간까지 기록하고 있다. 둘 중의 하나는 사도 요한이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이것은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만난 사건 자체가 생애의 결정적이고도 대표적인 사건이었고, 복음을 기록하는 순간에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제자들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요한의 어린양의 표현은 분명치 않다. 탈출 12,1-28의 파스카의 어린양으로도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고통 받는 하느님(야훼)의 종'으로도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또 날마다 성전에서 어린양을 드리는 번제를 연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중에도 무한한 사랑의 능력으로써 세상의 죄를 쳐 이겨 없애고 자신의 희생과 봉헌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실 '고통 받는 종'으로서의 그리스도께 대한 사상이 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이미 지난번 주님의 세례 축일 복음에서 보았듯이 당신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홀로 거룩하신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우리 인간들과 일치하심을 보여주셨다. 바로 이분을 세례자 요한은 '더 훌륭한 분' 자기보다 '앞서신 분'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하면서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드린다. 그렇게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간다.
두 제자는 어떤 계획도 없이 호기심에 이끌려 예수님을 따라간다. 그리고 대화도 인간적인 접촉과 체험에 바탕을 두고 전개된다. "'무엇을 찾느냐?'.....'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와서 보아라’...". 여기서 보면 예수께 대한 체험은 믿음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남에게로 옮아가게 된다. 나 혼자서만 간직할 수 없는 전하고 싶은 체험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찾느냐?" 이 질문은 첫 번째 제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제자들에게 우리들에게 던져지는 물음이다. 그 질문은 그리스도를 '따름'이 항구한 '추구'임을 생각하고, 그 '추구'의 동기와 내용을 끊임없이 확인하라는 권고의 말씀이다.
항구한 추구의 태도를 가질 때, 그분의 신비가 우리를 무한히 초월하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이나 그분에 대한 체험이 한계가 있음을 알고 오직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만이 '우리를 완전한 진리에로 인도하시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 때 우리는 더 그분 앞에 겸손할 수 있고 우리의 신앙의 공간을 보다 넓게 확장시킬 수 있다.
그리고 복음은 안드레아의 소개로 베드로를 예수님과 만나게 하는 장면과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소개하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먼저 불림을 받은 자는 '전달하는' 책임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삶의 의미로 체험하고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부르심'은 일반적으로 신앙과 사랑의 가치에 대한 강한 체험을 한 형제들의 '중재'로서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부르심'은 결코 '고립된' 것이라든가 '고립시키는' 사건이 아니다. 이 '부르심'은 공동체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시몬의 이름을 '바위'라는 뜻의 케파라고 하신 것은 교회 안에서의 사명을 이야기 한다. 예수께서는 그 바위 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한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더 헌신적으로 봉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