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언제 행복할까요? 어떤 이는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라고 말하고, 또 다른 이는 행복한 사람 옆에 있을 때라고 말합니다. 그 밖에 많은 행복의 때가 있을 것입니다.
심리학자 로버트 에먼스와 에드 디너의 연구에서, 행복을 느끼기 위한 조건으로 다음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삶에 대한 만족감, 둘째, 긍정적인 정서를 자주 느끼는 것, 셋째, 부정적인 정서를 적게 느끼는 것입니다.
결국, 부정적인 정서를 줄이면 행복해질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일에서 좋은 점을 더 빨리, 그리고 자주 발견하는 사람은 삶에 대한 만족감도 올라가서 행복해집니다. 이 모든 조건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늘 외적인 조건에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나의 해결보다 외적인 해결을 바라보니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헤로데 임금에 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임금으로 권력의 힘이 막강했습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모두 가진 것처럼 보이는 헤로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라면서 불안함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그에게 부정적인 정서가 가득하므로 결코 행복해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왕실 가족의 타락한 윤리 형태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목이 잘리는 순교를 하게 된 이유에는 헤로데의 작은 맹세가 시작이었습니다.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는 작은 맹세가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커다란 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맹세도 다 들어줄 수 있다는 착각, 그 착각이 그를 큰 죄인으로 만들었고 동시에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말합니다. 단 한 번의 커다란 행복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소소한 긍정적 정서를 여러분 느끼는 것이 행복해지는 지름길입니다.
물론 부정적 정서를 없애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긍정적 정서를 늘려서 부정적 정서를 흐리게 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차가운 물에 뜨거운 물을 계속 부으면 차가움이 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를 위해서 작은 죄도 범하지 않는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교만함을 버리고 겸손함으로 무장한 사람만이 계속된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행복은 바라는 게 없는 상태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합니다. 행복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바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행복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어떤 작가는 ‘행복은 바라는 게 없는 상태’라고 말했나 봅니다.
커다란 행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피정을 다녀온 후 자기 전에 그날 있었던 행복 체험 한 가지를 반드시 적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울한 감정이 가득했을 때, 자신이 써왔던 행복 일기를 펼쳤지요. 그런데 이제까지 썼던 행복을 보면서 재미있는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썼던 행복이 별로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상 안의 작은 기쁨들이 모여서 행복한 나를 만들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행복은 바라는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다가오는 행복을 찾고 그 행복을 누리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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