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이 소크라테스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다양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청년을 데리고 물가로 갔습니다. 그리고 물속에 들어가 잠수를 하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물속에 들어가 잠수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숨이 차올랐고, 그는 물 밖으로 나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청년이 나오지 못하도록 머리를 세게 누르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청년은 발버둥을 치면서 겨우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숨을 헉헉거리며 말입니다. 이때 소크라테스가 청년을 향해 묻습니다.
“자네가 물속에서 정말로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공기입니다.”라고 말하는 청년에게 소크라테스는 이야기했습니다.
“공기를 간절히 원한 만큼 지식을 갈구해야 하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쉽게 얻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간절함이라는 노력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기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 간절함 없이는 얻는다고 해도 진짜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원하는 것이 있다면 먼저 ‘간절함’을 가지고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그것은 씨앗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땅에서 새 생명으로 싹이 터, 본디 그것을 낳은 식물의 본성을 드러낸다는 비유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해골 터에 떨어져 돌아가시자 교회가 무수한 밀알로 싹이 터 성체라는 생명의 빵으로 구워졌으며, 그 빵은 그것을 받아 모시는 우리 안에서 몇 곱으로 늘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이 생명을 잃고 얻음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데, 그리스어에서 ‘생명’이라는 낱말은 영혼을 가리킵니다.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는 옳은 방법과 그른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 안에서 자기 영혼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른 방법이고, 하느님의 모습 안에 있는 영혼을 사랑한다면 제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따른다면 섬김의 길은 영광의 길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를 때 간절함을 가지고 있을까요? 세상 것에 대한 간절함이 먼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세상 것을 위한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 죽음에 관한 예고를 하십니다. 이미 당신 죽음을, 십자가상의 모욕적인 죽음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피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간절함과 하느님의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한 간절함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간절함을 두고 있으며, 특히 주님께 간절한 믿음으로 다가서고 있는지를 묵상해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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