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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27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3-27 조회수 : 2824


50년 이상 살아온 제 경험을 생각해볼 때, 어떤 일이나 다 똑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일이나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되었을 때는, 그 일이 어렸을 때의 내 꿈이었다 하더라도 똑같이 지겹고 힘들어집니다.

자신의 꿈을 단순히 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일 안에서는 기쁨과 희망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렸을 때의 꿈은 세상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가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그만큼 나의 의미와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로 받아들이게 될 때는 ‘의미’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나이 먹는 것이 서럽다고 말하게 됩니다. 꿈을 하나의 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일이 아니라 행복으로 나아가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세상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세상의 일만 좇은 사람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 없었고,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의미를 찾은 사람은 굳은 믿음으로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일로만 예수님을 마주하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권한을 지닌 분과 자신들이 감히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분의 권능이 입증되는 것에는 눈을 감아서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로마 체제 안에서 유지되는 자기들 나라의 한시적인 권한과 성전에 의지하며, 예수님이 반역을 꾸민다는 터무니없는 고발을 했습니다. 역시 세상의 일로 예수님의 활동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그랬습니다.

카야파의 예언 역시 하느님의 의미를 보지 않으면서 했던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그 시대에는 대사제의 직책을 로마인들이 뽑을 정도로 선정 과정이 썩어 있었다고 합니다. 즉, 그는 세상의 일을 하는 사람이지 하느님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정적으로 예수님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하느님의 의미를 찾지 못하니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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