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사람들이 제게 “왜 빠다킹이에요?”라는 질문을 하십니다. 이 ‘빠다킹’은 저의 별명입니다. 이 별명을 내세워서 ‘빠다킹 신부’라고 부른지가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이 별명에 대한 설명도 20년 넘게 해오고 있습니다. 강의하기 전에 자기 소개를 하면서, 책에서는 저자 소개란에서, 인터뷰 할 때에도 ‘빠다킹’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면, 목소리가 느끼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빠다(느끼함) + 킹(왕), 즉 왕느끼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20년 넘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 질문합니다.
“빠다킹 성인은 어떤 분이세요? 왜 이런 별명을 쓰는 거예요?”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고 합니다. 이는 저의 어떤 말과 행동도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을 해도 매번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굳이 남의 시선에 신경 쓰며 살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할 분은 오로지 주님뿐입니다. 주님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힘들면 겸손하기라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을 바라보고 또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서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늘 새롭게만 느껴집니다.
제자 중 많은 이가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면서 힘들어합니다. 제자들이 이럴진대 예수님의 원수들은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그 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 제자들 역시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말씀과 행동을 하시는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이 떠나는 것을, 또 자신을 적대시하는 것을 설득시키지 않습니다. 더 어려운 말씀을 하면서 그들이 주님 곁을 떠나는 것을 더 독려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도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너무나 쉽게 주님을 잊고 있으며, 주님 곁을 떠나려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내 뜻에 맞추는 삶이 아니라 주님 뜻에 맞추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장 필요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