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번만이라도 다시 얼굴을 볼 수 있다면....꿈에서라도 그 얼굴 한번만 볼 수 있다면!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복음 16장 16절)
다시 본다는 것, 단 한 번만이라도 꼭 보고 싶다는 것,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도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무엇이 그리도 급했던지,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황급히 떠나간,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배우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나 가족들이 생각날때 마다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딱 한번만이라도 다시 얼굴을 볼 수 있다면....꿈에서라도 그 얼굴 한번만 볼 수 있다면...’
그런데 오늘따라 스승님께서 작별을 예고하는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 마디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알쏭달쏭한 말씀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수가 없군.”
“조금 있으면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당혹해하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위로 말씀이 한없이 따뜻하고 희망적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을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복음 16장 20절)
제자들 입장에서 예수님의 부재 예고는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가족은 물론 재산, 청춘까지 포기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스승님은 제자들에게 삶의 의미요 희망, 전부였습니다. 그런 스승님이 떠나가신다니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고, 믿기조차 싫었던 것입니다.
아직 완전한 믿음과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안타까우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제자들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당신을 버릴지언정.
결국 제자들은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당신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꿈에 그리던 부활 예수님의 얼굴을 뵙는 순간 제자들은 세상 그 어떤 힘도 억누를 수 없는 완전한 기쁨, 충만한 행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 기쁨은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솟아올라오는 기쁨, 이 세상 그 어떤 권력자도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 곧 영원한 기쁨이며 종말론적인 기쁨입니다. 그 기쁨으로 인해 우리가 그간 겪어온 모든 혼란과 유혹, 고통과 슬픔은 흘러간 과거지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의 임박설은 초세기 교회부터 지금까지 고민을 던져주는 하나의 도전이요 과제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이비 지도자들이 이 재림 임박설을 남용하며 선량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멸망으로 몰고 갔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재림, 그리고 그와 결부된 종말론적 미래는 언제나 개방적입니다. 활짝 열려있습니다. 예수님의 도래로 인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으며 현재 진행형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성령을 통해 지금 이 순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매일의 말씀과 전례, 성사(聖事)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재림은 지속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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