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 때가 생각납니다. 거의 30년 전의 일인 것 같습니다. 당시에 어떤 신부님께서는 늘 저하고만 탁구를 하려고 했습니다. 저와 함께 치는 탁구가 제일 재미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탁구 실력이 남들보다 좋았기 때문에, 어떤 공이든 잘 받아서 딱 치기 좋게 넘겨줄 수 있었습니다. 상대방이 스매싱하고 날카로운 드라이브를 걸어 넘겨도 아마추어의 볼이기에 어렵지 않게 상대방이 계속 공격할 수 있도록 넘겨주니, 저랑 탁구 하는 것이 재미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를 떠올리며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떤 사람의 말과 행동으로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에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너무 힘들어하십니다. 그분의 공격을 제대로 막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공격을 제대로 막아내면서 랠리를 계속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맞습니다. 자신의 수준을 높여야만 합니다. 상대방보다 훨씬 성숙한 존재가 되면, 상대방의 공격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쉽게 받아넘기는 것은 물론이고 또 상대방이 쉽게 받을 수 있도록 딱 좋은 곳으로 다시 그 공격의 공을 넘겨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가 된다면 서로 재미를 느끼며 큰 기쁨을 갖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먼저의 나의 성숙도를 점검해보면 어떨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의 내용을 보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힘쓰신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앞날을 모두 알고 계신 주님이십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닌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느님이신 주님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의 모든 모습은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신 모범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과 같이 성숙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나의 영적 성숙도를 높이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기도와 묵상, 성경 읽기, 자선과 희생 등의 모습을 통해 주님과 닮아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안다는 것.
저는 책을 많이 읽습니다. 거의 1일 1책 수준으로 읽고 있습니다. 읽기 쉬운 책만 읽는 것도 아닙니다. 역사, 사회, 정치, 경제, 심리 등의 인문학 서적을 즐겨 읽고 있습니다. 이렇게 책을 많이 읽었다고 사람들은 저의 지식이 대단한 줄 압니다. 그러나 읽을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읽을 책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읽을수록 제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대화가 되지 않는 사람은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책을 읽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단편적인 지식이 세상의 지혜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과 대화하기가 제일 힘듭니다.
주님도 그렇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 기도가 부족해요.”
하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왜 하느님께서는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거예요? 저도 나름으로 열심히 기도하면서 살고 있다고요.”라면서 불평불만을 말합니다.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짜 앎이 아닐까요?
(조명연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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