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진 어느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자신의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 쓰고 싶어서 신학교에 들어갔고 신부가 되었습니다. 몇 년 뒤, 본당신부가 되었고 이 본당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치겠다고 다짐했지요. 성가대를 활성화하고 미사를 창미사로만 봉헌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말합니다.
“신부님, 미사가 너무 길어요.”
어느 신자가 찾아와서 말합니다.
“신부님, 성령 기도회를 하면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이 말을 듣고 본당에 성령 기도회를 만들고 자신도 열심히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이 역시 싫어하는 본당 신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신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께서 유머 감각이 있어야 신자들이 찾아옵니다.”
강론 때마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할 것인가를 생각했고, 각종 유머를 남발했습니다. 그런데도 신자들이 줄어듭니다.
이 신부님은 남의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정작 하느님의 말씀은 듣지 않은 것입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 사람들과 논쟁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을 하지요.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후세계의 일입니다.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의 편협된 사고를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로써 하느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크신지를 보여주시지요.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브라함에 맞게, 이사악 시대에는 이사악에 맞게, 야곱의 시대에는 야곱에게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시대에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지금 내게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의 말만 들으면서 잘못된 길을 가게 되며,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관심 안에만 머물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누구의 말을 듣고 있습니까? 우리가 들을 말은 세상의 말보다 하느님의 말씀이며, 세상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러시아의 소설가,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유명한 일화입니다.
산책하다가 광장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걸인을 발견했습니다. 한겨울임에도 아주 얇은 누더기만 걸치고 있었습니다. 푸시킨은 이 불쌍한 걸인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역시 가난해서 당신에게 줄 돈은 없소! 대신 글씨 몇 자를 써서 주겠소. 이를 몸에 붙이고 있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푸시킨의 말처럼 이 걸인의 깡통에는 그 뒤 많은 돈이 쌓였습니다. 푸시킨이 이 걸인에게 써 준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이렇게 써줬습니다.
“겨울이 왔으니, 봄도 멀지 않으리라.”
사람들은 이 걸인을 보면서, 그가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런 사람은 도와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을 보이면서 살고 있습니까?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자신이 보이는 모습을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요? 희망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만이 행복을 간직하면서 살게 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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