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저처럼 힘든 삶을 살아온 사람도 없을 거예요.”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시며 전해 주신 이분의 삶은 정말로 힘든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분보다 힘든 사람이 없을까요? 또 더 힘들게 살면서도 기쁨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이 없을까요?
20년 넘게 사제로 살면서 참 다양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다른 이의 삶을 평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저렇게 어떻게 살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게 사는 것이 분명한데도, “너무 감사해요.”라면서 밝게 웃는 분이 있습니다. 또 별것도 아닌 것을 대단한 것으로 치장하면서 세상에 자신보다 힘든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시며 펑펑 우시는 분도 계십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중요한 것은 ‘나’라는 기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어디에 기준을 맞추고 있느냐에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불행하다면서 불평불만 속에 살 수도 있습니다.
‘나’의 기준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주님께 가까운 사람은 힘듦 안에서도 의미를 찾으며 행복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에만 가까이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불행의 이유만을 찾게 됩니다. 당연히 힘들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를 얽어매고 구속하는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율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랑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이 땅에 오셨음을 밝히십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단순히 계명 자체에만 의미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율법의 정신은 바로 ‘사랑’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의 실천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이야말로 주님께 가까운 삶을 사는 것으로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에 더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까요? 아니면 큰 사람이라고 불릴까요?
새로운 시도
미국의 지휘자 레오폴드가 베토벤의 서곡을 준비하면서 극적 효과를 살리기 위해 트럼펫 연주자를 관중석에 앉아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휘봉으로 신호를 보내면 관중석에서 솔로로 연주하는 아이디어를 낸 것입니다.
공연 당일, 이 아이디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이라이트인 트럼펫 연주 구간이 나와 지휘봉으로 신호를 보냈지만, 관중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만 날 뿐 트럼펫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관리인들은 이 트럼펫 연주자를 공연을 방해하는 방해꾼으로 알고 제지했었던 것입니다.
멋진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면 멋진 공연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이 아이디어는 묻히고 말았으며, 망친 공연이 되고 맙니다.
우리도 종종 좋은 아이디어를 냅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과의 합의를 이루어내지 않은 아이디어는 최악의 생각이 될 수도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