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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24일 _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6-24 조회수 : 1825

수도자들의 모델이요 이정표 세례자 요한!
 
좀 의아스럽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성인(聖人)들에게도 등급이 있습니다.
어떤 성인은 대성인(大聖人)으로 분류되어 교회 전례 안에서 대축일로 경축합니다. 축일을 앞두고 9일기도까지 바칩니다.
그러나 어떤 성인은 전례 안에서 이름만 기억할 정도입니다.
 
보통 성인들은 세상을 떠나신 날, 다시 말해서 하늘나라에 입국하신 날을 축일로 정해 한번만 기억합니다.
그러나 어떤 성인은 여러 번에 걸쳐 축일을 경축합니다.
성모님이나 수제자 베드로 사도, 바오로 사도,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세례자 요한이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도 축일로 정해 기억하지만, 오늘같이 그의 탄생도 경축합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교회 안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대성인이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는 다리 역할에 충실했는가 하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길을 닦는 선구자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복음서에 드러난 세례자 요한의 행적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얼마나 예언자로서 충실한 삶을 살았는지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오로지 주님의 길을 닦는데 온 힘을 다하기 위해 그는 결혼조차 포기하고 홀로 살았습니다.
지극히 겸손했으며 철저히 순명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주님을 재빠르게 알아보기 위해 늘 깨어 있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술이나 산해진미나 세상의 좋은 것들을 철저히 멀리하고 광야 깊숙한 곳에서 극단적 청빈 생활을 해나갔습니다.
오늘날 우리 수도자들의 모델이요 이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세례자 요한의 삶에서 두드러지는 측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는 거대한 불의와 구조적인 악 앞에서 절대 침묵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단호하게 예! 라고 할 것은 예! 라고 하고, 아니오! 라고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말했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삶, 말만 들어도 왠지 그럴 듯 해보입니다. ‘있어’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어 보입니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예언을 들으려고 몰려 들었겠지요.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품위 있고 장엄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는 하늘을 찌르겠지요.
추종자들은 늘 나를 큰 스승으로 떠받들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언자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전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위해 밤샘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참전달자로 계속 존재하기 위해 부단히 화려한 도시를 떠났습니다.
황량하고 고독한 광야로 계속 깊이 들어갔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보십시오.
그의 나날은 그야말로 ‘초근목피’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주식은 날아다니는 메뚜기였습니다.
음료수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들꿀이었습니다.
그가 걸치고 있었던 의상을 보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무슨 원시인입니까? 낙타털옷에 가죽띠입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였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계속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결한 영혼을 계속 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확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온통 만연해 있는 세상의 죄악과 타락 앞에 당당히 맞서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끝도 없는 자기 비움의 삶, 뼈를 깎는 자기 통제의 연속, 자아 포기, 자기 연마, 자기 부정의 나날이
세례자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목숨 걸고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철저한 겸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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