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에서 가장 힘든 일은 남이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온전히 이해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해하지 못할 때, 상대는 ‘나’를 ‘오해’하게 됩니다.
오해는 다음과 같은 경로로 생깁니다. 첫째, 남이 이해 못 하는 말이나 행동을 내가 별 뜻 없이 해서 생깁니다. 둘째, 남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나의 것과 다른 경우입니다. 셋째, 남이 내 모습에서 과거의 누군가를 무의식적으로 떠올려서 오해했을 가능성입니다.
이해를 받는다면 상관없지만, 오해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분명 오해는 화나고 속상함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무서워서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도 한문을 숭상하는 학자들의 오해를 받았었습니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도 무능력한 조정의 오해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도 오해를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요한 세례자는 어떻습니까? 그 역시 사람들의 오해를 받았습니다. 광야에 나가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모습에서 얼마나 많은 오해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오해’에 흔들리지 않았기에 ‘지금’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은 어떤 것 같습니까?
오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보내면서, 복음은 요한 세례자의 명명식 장면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요한’이라고 이름을 정한 아기 어머니의 말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지요.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거나 친척의 이름을 따라 하는 관습에서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을 할 수 없었던 즈카르야가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씁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오해를 가져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사람의 오해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계속된 오해에 흔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곳은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집중하는 사람은 오해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일을 충실하게 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나의 커다란 획을 긋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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