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0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20,27-40 : 천국에서는 장가드는 일이 없다
“사두가이”란 보상을 바라고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의로운 자”라는 뜻으로 불린 명칭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의 보상심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부활을 믿지 않는 특별한 분파였다.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던 사두가이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로 모여들었다.
이 사두가이들이 한 여인이 일곱 남편을 맞게 되는 경우를 들어 예수께 질문을 한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33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태22,29-30) 고 하셨다. 하느님의 권능은 너무나 크시다.
어째서 그럴까? 그들은 두 번 다시 죽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주님께서는 다가오는 세상의 ‘새로운’ 상황을 알려주신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34-36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삶의 모습’이란, 부활 자체가 결혼의 목적성을 상실해 더 이상 자손을 낳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같아지기 때문에’(36절) 죽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36절)라고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도록 되어있고 또 그 부활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에 연결되고 있다. 즉 부활로써만이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지금부터 ‘하느님의 자녀’이다. 지금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분의 생명에 결합되어있기 때문에 장차 부활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가는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35절)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므로 모든 일상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로 가는 진실한 ‘하느님의 자녀’임을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이라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만이 마지막 부활을 믿을 수 있고 또 갈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37절)이라고 한 것은 모세는 그 순간에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그 선조들과 ‘생명의’ 관계에 있고, 신비스러운 친교를 통해 계속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과 우리를 만나게 하는 그분과의 ‘일치된 생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38절).
즉 그리스도인은 현재 이 순간부터 그분과 사랑의 일치 속에 살아가야 하며, 그 일치가 죽음을 넘어 우리의 육신까지도 살려줄 마지막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기를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분과의 사랑의 일치 속에 사는 것이 참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하느님의 영광이 되는 인간이다. 이러한 삶을 살도록 결심하며 기도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