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는 흉악 범죄자들이 종종 매스컴의 일면을 장식합니다. 그런데 이 범죄자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쓴 글이나 그들이 하는 말에는 거의 ‘나’라는 단어가 주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우리’라는 단어를 찾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나’만을 바라보고, ‘우리’를 전혀 생각하지 않으니 함께 살기 위해 지켜야 할 사회 규칙을 전혀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를 생각하고 바라볼 때 많은 점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더 큰 어려움으로 힘들어하는 ‘우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우리’ 안에서만 나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을 도우고 함께하면서 더 큰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 점을 계속 강조하셨습니다. 실제로 우리 모두가 하나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제 ‘나’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바라보고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원하시는 ‘하나’ 되는 길도 열립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몇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자식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해서 자식을 낳아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곱 형제 모두가 그 형수를 아내로 맞이했지만, 자식 하나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이럴 때 부활했을 때, 이 일곱 형제 중에서 누가 형수의 남편이 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누구와도 부부라고 말할 수 없으므로, 이런 곤란한 상황을 하느님께서는 만들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습니다. 시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당시 과부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동생이 보살펴야 한다는 규정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사두가이파들은 편협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관점에서 율법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주장만 맞다는 생각을 가지면 닫혀 있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으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 집중하게 하는 주님의 사랑을 보고 또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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