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하는 일을 바라보는 모습에 따라 크게 소명(Calling)과 생업(Job)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두 부류의 차이는 너무나 큽니다. 소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은 필요한 것이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며 세상에 무언가 이바지를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즐거움과 만족감이 훨씬 높았습니다.
이렇게 소명(Calling)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행복도는 훨씬 더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명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요? 자기 일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찾아 나갔을까요? 이 모든 것이 자기 일에 대한 믿음을 가져온 것입니다. 바로 믿음은 커다란 의미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온 갈릴래아 땅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근처에 왔다는 말만 들으면, 하던 일도 모두 팽개치고 예수님을 향해 떠났습니다. 이렇게 많은 군중이 모여들면 겁이 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정치인입니다. 군중을 모으고 있는 사람이 자기네 편이면 상관없지만, 자기네 편이 아니면 큰일이기에 신중하게 살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사회의 정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제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이 제관들에게 예수님의 발언과 행동을 보고하면서 뜻을 함께했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하나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서 들것을 달아 내려보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신성모독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얘야”라고 부르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특별히 믿음을 가상히 여길 때 이 사랑스러운 말씀을 쓰셨습니다. 그런데 중풍 병자의 믿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으며 죄의 용서까지 해주셨습니다.
물론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이제부터는 이 세상에서도 죄가 사해진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치유하지 않으십니다. 말씀 한마디로 병을 고쳤다는 것은 하느님의 방법으로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무조건 믿고 중풍 병자를 들것에 실어 내려보낸 사람들의 믿음과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이유로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만 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불신이 크게 대조가 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나요? 계속 묵상하면서 주님과 자신의 관계를 생각하며 굳은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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