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고등학교 다니는 남학생 중에는 이마에 여드름이 나면 학교가 아니라 피부 관리샵에 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만큼 외모에 신경을 쓴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자신을 온전하게 볼 수 없습니다. 즉, 일부러 거울을 보지 않는 한 자기를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결국 외모에 신경 쓰는 것은 모두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자기를 위해 피부를 가꾸고, 멋진 옷을 입는다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다시 말해 남을 위해서 하고 있을 뿐입니다.
군대에 있을 때, 또 신학교에서 기숙사 생활할 때 거의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남에게 보여 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훨씬 자유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이타적인 사랑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사랑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보여주기만을 위한 것은 사랑인 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이타적인 사랑은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 주님의 시선에 집중합니다. 사랑의 실천 자체에 기쁨을 얻지, 남의 평가에 기쁨을 얻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떠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러운 변모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이를 마르코 복음에서는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라고 전합니다. 태양과 빛의 찬란한 광채는 하느님의 현존을 반영하는 것으로,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얼굴이 너무나 빛나서 사람들이 쳐다볼 수가 없었다는 기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복음의 예수님 모습은 옷조차도 새하얗게 빛났다고 표현하면서 더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광채가 빛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가득한 곳, 그런데 여기에 이스라엘이 가장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도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베드로가 여기에 지내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잊은 것입니다. 인간 구원을 위해 오신 주님의 사명을 잊고, 그냥 영광 안에만 머무르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였던 세상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예수님의 사랑은 편한 곳에 머무는 사랑이 아닙니다. 또 보여주기만을 위한 화려한 사랑도 아닙니다. 진짜 사랑은 그들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