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부로부터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어. 분명 자기보다 먼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왜 키우는 거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 역시 신부가 되고 나서 몇 차례 개를 키웠고, 지금도 네 마리나 키우고 있습니다.
동물의 생애는 인간보다 훨씬 빠르기에, 키우고 있는 개의 죽음을 직접 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도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반려동물과 사랑을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이별의 상실이 있지만, 사랑의 기억이 이별의 상실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사람 역시 죽음으로 이 세상 안에서의 이별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닙니다. 사랑의 기억 속에서 소중한 만남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사랑의 가치가 이별의 가치보다 더 큽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는 또 다른 힘을 얻어 지금을 열심히 살 수 있게 됩니다. 다시 사랑할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만남을 기억하며 삽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계명은 ‘사랑’이었고, 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곧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도 시대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돌팔이 구마자들이 주문을 외며 마귀를 쫓아낸다며 떠들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데에 예수님의 이름을 도용했고, 사도들에게 그 능력을 팔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이 예수님 생전에도 있었나 봅니다. 성격이 불같다고 하여 천둥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진 요한이 이 모습을 보았으니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는다고 사마리아 마을에 하늘에서 불을 내려치겠다고 했던 사람이었으니, 가만히 있지 못하고 중단시키고 예수님께 보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막지 말라고 하시지요.
주님을 반대하지 않고 지지하는 이는 비록 교회 안에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더라도 교회를 해칠 리가 없으니 배척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반대하지 않고 지지하는 이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 많은 은사가 있기에 교회의 성사 생활로 더 많은 사랑과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소속되어 있지 않더라도 사랑을 실천하는 이를 배척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의 실천이 곧 주님을 따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사랑 실천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죽음 뒤의 하느님 나라 안에서도 그 영향이 미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사랑하며 주님을 따르고 지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1 독서의 야고보 사도의 말씀처럼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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