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다시 한번 우리 삶의 중심으로!
저희 수도회 본부에서 내려오는 지침이나 과제 가운데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영적 생활에 대한 우선권’ ‘하느님에 대한 우선권’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요한복음의 표현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게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복음 3장 31~36절)
오늘 내 삶 안에서도 하느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시는가, 오늘 내가 내리는 모든 결정과 선택 앞에서 하느님께 우선권을 드리는가, 하느님은 오늘 내 삶 안에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가, 한번 점검해볼 일입니다.
인간은 놀라울 정도로 미묘하고 복합적인 존재입니다.
육체와 영혼이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동물적인 본능이 깊숙이 숨어있는가 하면,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정도의 이타성도 잠재되어 있습니다.
정말 나약해서 흔들리는 갈대같이 별것도 아닌 존재 같지만 때로 얼마나 선해질 수도 있는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이런 우리 인간이기에 고른 성장이 필요합니다. 지적인 교육뿐만 아니라 영적인 성숙을 위한 노력,
인간적 성숙을 위한 노력, 육체적 성숙을 위한 노력이 동시에 요구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디 그렇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죽기 살기로 달달 외우고,
반복해서 문제를 풀어 좋은 성적 내는 것이 지상과제입니다.
무한 경쟁 체제, 일렬로 줄 세우기 문화 앞에서 함께 가는 동료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어떻게든 나만 잘 풀리면 그만입니다.
하느님의 영역, 신앙이 설 자리가 점점 축소되는 분위기입니다.
특히 우리 청소년들에게 하느님과 교회에 대해, 신앙과 배려에 대해, 가난과 겸손의 덕에 대해 이야기 하면 웃어버리는 경향도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정말 어려운 시대, 참으로 다양한 도전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그럴수록 신앙인들은 더 외쳐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이사야나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을. 그분의 참되심을, 결국 그분께서 승리하실 것임을.
요한 복음사가는 하느님의 위치를 어디에 둬야 하는지 명확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소홀히 해오고 등한시해왔던 하느님의 위치를 다시금 재설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세상 모든 것 위에, 다른 모든 것에 앞서 내 삶의 최우선 순위로 다시 한번 하느님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존경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누가 뭐래도 그는 내 인생의 No. 1이며 그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역시 당연히 내 사랑에 상응하는 노력을 보여줘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해 계속 눈길을 돌립니다.
그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해 방긋방긋 웃으며 다가갑니다.
그런 순간 느낄 배신감과 비애감은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 각자를 향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이 지상에 잠시 머무시는 동안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우리를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시는지를 온몸과 마음으로 잘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일회적이거나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영원히 구원하고 영원히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십자가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런 무한정의 사랑, 정말이지 우리를 향한 불타는 사랑, 이글거리는 뜨거운 사랑, 어찌 보면 바보 같은 사랑을 끝도 없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태도는 너무나 냉랭합니다.
감사는커녕 그 큰 사랑을 헤아려보지도 않습니다. 거의 배은망덕 수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작업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하느님,
우리 뇌리 속에서 점차 외곽으로 밀려나시는 하느님을 다시 한번 삶의 중심으로, 정신이나 사고의 중심으로 회복시키는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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