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
죽음 연습을 통한 용서 연습
용서를 주제로 강론 중이던 신부님께서 좀 더 생동감 있게 강론 좀 해보시려고 신자들에게 질문을 한 가지 던졌습니다.
“지금 이 순간 미워하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으신 분, 한번 손 들어보세요!”
적어도 두세 명은 있겠지, 했었는데 단 한명도 손드는 신자가 없었습니다.
당황스러웠던 신부님께서 절박한 목소리로 다시 외쳤습니다.
“정말 아무도 없습니까? 옆 사람 눈치 보지 마시고 소신껏 손 한번 들어보세요.”
그래도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적막감과 난감함만이 맴돌던 어느 순간, 아주 연로하신 할아버님 한분이 손을 드셨습니다. 너무나 기뻤던 신부님은 할아버님을 앞으로 모셨습니다.
“어르신, 정말 훌륭하십니다.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으면, 또 얼마나 열심히 용서의 삶을 실천하셨으면 단 한명도 미워하는 사람이 없으십니까?
우리 신자들을 위해서 그 비결을 좀 말씀해주십시오.”
그 순간 할아버님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 한 마디를 던지셨습니다.
“신부님, 훌륭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세상을 너무 오래 살았습니다.
올해 제 나이가 90입니다.
원래 저도 미워하던 사람들 엄청 많았는데, 오래 살다보니 그 사람들 다 죽어버렸습니다.
용서를 하려해도 용서할 사람이 있어야지요.”
보십시오.
그렇게 어려운 용서이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하나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죽는 것’입니다.
그가 죽던지, 내가 죽던지,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다 부질없어집니다.
오랜 세월 주고받았던 상처도 순식간에 아물어 버립니다.
자동으로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용서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목숨을 끊으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은혜롭게도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는 살아있으면서도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죽음의 길’이 있습니다.
마음 한번 크게 먹고, 크게 한번 뒤로 물러서면 그게 바로 죽는 길입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예수님의 자기낮춤, 어처구니없이 바보 같은 사랑을 한번 실천하면 그게 바로 죽는 것입니다.
그런 ‘죽음연습’을 통해 죽기보다 힘든 용서지만 조금씩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용서만이 우리의 살 길
누군가가 가슴에 찌르고 간 비수 같은 한 마디 말을 도저히 용서하지 못해 새벽녘까지 밤잠을 설친 적이 있으십니까?
내 인생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사연 많고 풍파 많은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몇 번씩 그런 체험을 하게 되지요.
상처가 채 아물지 못한 순간, 통증이 아직 가시지 않은 순간, 분노로 치가 떨리는 순간,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가 안 되는 그 순간은 사실 ‘살아도 살아있지 못한 순간’입니다.
끝까지 용서가 안 되는 그 순간이야말로 지옥입니다.
사실 지옥은 누군가가 우리를 보내서 가게 되는 그런 장소이기보다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장소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사랑이 미움 앞에서 무력하게 사라지는 순간,
속수무책으로 그 상처를 안고 숨죽여 울 수밖에 없는 순간, 우리 스스로 그 죽음과도 같은 증오의 감정을 안고 끝도 없는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곳이 지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 용서가 안 되는 그 순간 세상은 온통 회색빛입니다.
분노가 지속되는 만큼 건강도 심각한 타격을 입습니다.
명치가 답답해져옵니다.
속에 큰 돌덩어리가 하나 들어앉은 기분입니다.
‘그 인간’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얼굴이 확확 달아오릅니다.
어렵겠지만 어떻게 해서든 그 수렁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합니다.
정말 힘겨운 일이겠지만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있는 ‘그 인간’을 한시라도 빨리 내 속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비워야 합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우리를 향해 집요하게 용서하라고 당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술 더 뜨십니다.
용서할 뿐만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두 번도 아니고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이건 너무 지나친 권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건 차라리 바보가 되라는 거야 뭐야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용서만이 살길이니 밥 먹듯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말고를 따질 것이 아니라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할까 말까 고민할 것이 아니라 늘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그 순간부터 특별한 한 가지 현상이 우리의 신심을 뒤흔듭니다.
누군가가 내 안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 삶 안에 끼어들어와 내 삶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늘 삶이 부자연스럽습니다.
삶이 부담스럽고 피곤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하느님 체험도 불가능합니다.
결국 용서만이 우리가 살길이며 용서만이 참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오 18장 21-35절).
용서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
많은 신자분들께서 제게 묻습니다.
“용서를 잘 할 수 있는 비결이 혹시 없을까요?”
한 영적 스승의 가르침을 한번 귀담아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상처니, 아픔이니, 용서니 하는 말이 더 이상 우리 안에 문제되지 않게 원천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하길 바랍니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잘 갈고 닦아 미움이나 분노, 실망과 좌절 같은 감정들에 더 이상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무장하길 바랍니다.
우리 내면이 튼튼하면 튼튼할수록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이나 모욕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게 됩니다. 쉽게 넘길 수 있고 당당하게 맞설 수 있으며 결국 쉽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본인 자신입니다.
용서를 통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자유로워집니다.
나 자신부터 편안해집니다.
내 인생길이 활짝 열립니다.
용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가장 구체적인 현존방식입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십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십니다.
용서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서로 용서를 주고받는 인간관계 안에서, 다시금 새롭게 출발하는 인간관계 안에서 하느님께서 환하게 미소 짓고 계십니다.
이웃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를 통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기쁘게 용서하십니다.
용서가 있는 곳에 하느님 사랑의 기적이 시작됩니다.
용서가 이루어지는 그 곳에서 새로운 차원의 영적 삶이 재개됩니다.
마음이 담긴 진실한 기도를 통해 용서의 길을 걷기 바랍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과거란 감옥에서 나와 이웃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과거의 아픈 기억에서 탈출한다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나와 이웃의 손에 미래란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쥐여 주는 일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두려움을 떨치고 용감하게 일어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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