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인 필레몬서를 읽고 묵상하면서 노년기에 접어든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세밀하게 유추할 수 있어 참으로 은혜로웠습니다.
젊은 시절, ‘열개의 팔’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펄펄 끓는 혈기와 넘치는 에너지로 온 세상을 뛰어다니며 주님의 복음을 전하던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오로 사도는 달릴 곳을 다 달렸습니다.
마치 경주마 시절을 끝낸 폐마(廢馬)와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제는 기력이 떨어져 달리고 싶어도 달릴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아직 청춘이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온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픕니다.
수시로 닥쳐오는 통증으로 인해, 자면서 몇번이나 깨어 끙끙 앓습니다.
아침이면 안간 힘을 다 써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날씨라도 궂으면 삭신이 부서지는 듯 합니다.
지팡이를 짚어야만 겨우 운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혹독한 상황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늙고 병든 것도 모자라 투옥된 신세였습니다.
연세 드셨지, 갖은 병고로 괴롭지, 옥에 갇혀있지, 정말이지 바오로 사도의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토록 울적하고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의 목소리에는 초대 교회 신자들과 동료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 희망과 연민의 정으로 가득합니다.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텐데, 마지막 남은 모든 에너지를 모아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오늘 쓰신 편지의 수신자는 콜로새 교회의 지도자로 추정되는 필레몬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께서는 다른 편지와 달리 필레몬에게 쓰신 서한에서는
무척이나 간곡함이 돋보입니다.
필레몬에게 한 가지 어려운 부탁이 있었는데, 꼭 좀 들어 달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필레몬의 소유의 종 오네시모스가 어느날 갑자기 도망쳐나왔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감옥에 갇혀 있던 바오로 사도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극진히 바오로 사도의 옥바라지를 하였습니다.
자연스레 오네시모스는 바오로 사도에 의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마음 같아서는 충직한 오네시모스를 곁에 두고 싶었지만, 당시 법이 정하는데로 노예 신분인 오네시모스를 주인 필레몬에게로 돌려보내야만 했습니다.
도망쳐 나온 노예 오네시모스를 주인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는 바오로 사도의 심정이
참으로 착찹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큰 걱정이 앞섰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분노한 필레몬이 오네시모스를 힘들게 할지 모른다는 걱정이겠습니다.
서한의 내용 중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가 그대에게 손실을 입혔거나 빚은 진 것이 있거든 내 앞으로 계산하십시오.
나 바오로가 이 말을 직접 씁니다. 내가 갚겠습니다.”(필레몬서 19절)
아마도 오네시모스는 주인 집에서 도망나오는 과정에서 도피 자금으로 주인 필레몬의 돈을 훔쳤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한 오네시모스가 도망나옴으로 인해 생긴 피해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바오로 사도가 갚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늙은이’
‘예수님 때문에 수인이 된 몸’이란 표현까지 구구절절 써가며 필레몬에게 간청하십니다.
노예 오네시모스를 바라보는 노인 바오로 사도의 시선이 참으로 따뜻합니다.
당시 다른 사람들은 오네시모스를 사람도 아닌 가축 같은 존재, 자신이 어떻게 해도 상관없는 소유물, 매매의 대상으로 바라봤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오네시모스를 더 이상 종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랑하는 형제로 바라봤습니다.
주님 은총 안에 새로운 인간이요 신앙의 동지, 총애하는 아들로 바라봤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바오로 사도가 오네시모스에 대해 ‘내 심장과 같은 그’라고 까지 표현합니다.
노예 제도를 자연스럽게 바라봤던 당시, 바오로 사도의 이런 자세는 놀라움을 넘어 스캔들이 될 정도였습니다.
오늘 날 노예 제도 등과 같은 신분으로 인한 차별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다양한 측면에서의 심각한 차별이 존재합니다.
언제나 눈과 마음을 활짝 열어 유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혹시라도 은연 중에 우리 공동체 안에 그런 차별이 존재하는지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물론 예수님께서 가장 가슴 아파하셨던 측면이 구성원들 사이의 차별이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전국민적 관심사였던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틈틈히 시청하며 정말이지 슬펐습니다.
청문회장 한켠을 차지하고 줄줄이 앉아 계셨던 분들, 그들이 보여준 언행 하나 하나는 마치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오만하고 무례한 모습, 파렴치하고 비인간적인 모습들을 수많은 우리 어린 청소년들도 보고 있을텐데, 하는 마음에 큰 걱정이 앞섰습니다.
아무리 상대가 밉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동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 존재에 대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정치’라는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로서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하더군요.
후보자를 앞에 두고 깐죽거리며 우롱하고, 상대를 올가미에 옭아매기 위해 갖은 유치한 언행들을 총동원하는 모습을 보며,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그 산더미 같은 죄를 어떻게 갚을 수 있겠는지, 걱정이 되더군요.
그들이 몰염치하게도 ‘국민이 보고 있습니다!’ 운운할 때는 정말이지 뒷골이 다 땡기더군요.
국민의 대표라고 자처하려면, 품위있고 격조높은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수준에 걸맞게,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겸손하고 진지하게 질문하고 발언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시종일관 시정잡배도 그렇게 하지 않을 정도로, 껄렁껄렁·후안무치, 수준 이하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루 온 종일 그들이 한 일은 온 국민을 모욕하고, 범 국민적 스트레스 지수를 한껏 드높인 것뿐이라는 생각은 저 혼자만의 생각일까요?
정말이지 지도자를 잘 뽑아야겠습니다.
국민들 생각은 눈꼽만치도 하지 않는 지도자, 틈만 나면 버럭 버럭 소리 지르는 지도자, 언행에 품위나 성숙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지도자, 비열하고 천박한 지도자를 뽑는 순간, 그 뒤로의 감내해야 할 고통과 부끄러움은 순전히 우리 국민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