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에 이끌려 믿음으로 해야 할 일, 살림!>
“상선벌악”(賞善罰惡). 비록 현실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침내 선한 사람에게는 상이, 악한 사람에게는 벌이 주어지리라는 ‘희망’이요, 꼭 그렇게 되리라는 ‘믿음’입니다. ‘선한 일’이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면, ‘악한 일’은 ‘사람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선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사람일 수 있음’이 이미 주어진 상이요, ‘악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사람일 수 없음’이 이미 내려진 벌입니다.
해야 할 일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하느님 앞에서 해야 할 일을 한 사람, 곧 다만 사람일 수 있음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은 “자비의 육체적 활동,” 곧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주며,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는 이들을 찾아가 주며, 죽은 이들을 묻어 주는 것”과 “의심하는 이들에게 조언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며, 죄인들을 꾸짖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우리를 모욕한 자들을 용서해 주고,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인내로이 견디면,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는 “자비의 영적 활동”입니다(교종 프란치스코, 자비의 얼굴, 15항). 이러한 자비의 활동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살림’입니다. 그러니 ‘살림’이 ‘해야 할 일’이요, ‘죽임’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는 당연히 ‘살림’이 넘쳐나야 하지만, ‘죽임의 문화’, ‘죽임의 정치’, ‘죽임의 경제’, ‘죽임의 무엇’이 어찌 보란 듯이 활개를 치고 있을까요.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일 수 없는 개탄스러운 현실에서, 사람을 당신 모습대로 지으신 하느님의 침묵은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당신께서 구해 주시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폭력이다!” 하고 소리쳐야 합니까?”(하바쿡 1,2).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듯한 하느님을 향한 예언자의 절규가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하바꾹 2,3)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나아갈 밖에요.
허나 이 믿음이라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라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간청했는지도 모릅니다. 허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마침내 그리 되리라는 믿음 말이지요. 이 믿음은, 빛이 어둠을 이기리라는 믿음이고, 평화가 폭력을 물리치리라는 믿음이며, 정의가 불의를 정화시키리라는 믿음이고,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을 때 참으로 살리라는 믿음이며. 마침내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당신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리라는 믿음입니다.
믿음을 이루는 영
믿음은 현실과 괴리된 망상이나 자기 최면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에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쉼 없는 결단의 행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2티모 1,7).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을 이루기 위해서, 저 살자고 불의와 거짓에 침묵하고, 하느님과 맘몬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는 ‘비겁함의 영’이 아니라, 불의한 폭력에 맞서고, 벗들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힘의 영’을 따릅니다. 죄 없이 착한 벗들의 고통에 연대하며, 가지기보다 나누고, 섬김 받기보다 섬기는 ‘사랑의 영’을, 추악한 탐욕을 거슬러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을 드러내는 ‘절제의 영’을 따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맡은 훌륭한 것을 끝까지 지켜나갈 것입니다(2티모 1,1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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