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는 매일 매 순간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일상적인 과제입니다!
신앙 안에서 참으로 경계해야 할 적들이 있습니다.
쇄신과 거듭남을 위한 시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타성에 빠진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의 성장을 위한 노력은 조금도 없이 ‘내가 올해로 신앙 생활한지 30년이네, 40년이네’ 하는 자만심입니다.
늘 치열하게 자신을 담금질하려는 노력은 뒷전인 채 쓸데없이 지니고 사는 우월의식입니다.
신앙의 핵심에는 조금도 접근 못 한 채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외형에만 잔뜩 신경 쓰는 위선적 신앙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예수님 가시는 곳 마다 수많은 군중이 운집하곤 했었는데, 그중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기적과 표징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현장에서 목격해놓고서는, 그래도 모자랐던지,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참으로 기가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한 이래 그동안 보여준 표징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 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침식까지 잊어가며 그들을 위한 사랑의 손길을 펼치셨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셨습니다.
앞이 안보이는 이들에게 시력을 되찾아주셨습니다.
청력이 손상된 사람들의 귀를 열어주셨습니다.
심각한 언어 장애를 안고 있는 이들의 말문을 트이게 하셨습니다.
온몸이 나병으로 문드러진 말기 환자의 피부를 말끔히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꼼짝못하고 누워만 지내던 중풍 병자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이미 목숨이 떨어진 회당장의 딸을 되살려주셨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의 병을 낫게 하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의 거센 풍랑을 말씀 한 마디로 잠잠하게 만드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그들에게 치유의 능력과 악령들을 쫓아내는 능력을 부여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전무후무한 명설교, 생생하게 살아있는 말씀으로 당신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 땅에 보내신 메시아임을 명명백백히 밝히셨습니다.
더 이상 무슨 표징이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사실 군중이 요청한 표징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표징이었습니다.
결코 요구해서는 안 될 자신들의 개인적인 욕구, 얼토당토않은 허황된 바램, 끝도 없는 이기적인 욕심들을 충족시켜달라는 요구였습니다.
끝도 없이 엉뚱한 요구를 해대던 군중은 하느님의 뜻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뜻을 따르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그들의 요구 앞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실 리가 없습니다.
마음이 완고해질 대로 완고해진 군중, 끝까지 돌아서지 않는 군중의 행태에 너무나 가슴이 아프셨던 예수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와 남방 여왕의 예를 들며 거의 독설에 가까운 말씀을 그들의 가슴이 던지십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복음 11장 31절)
참으로 불행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자신들은 스스로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민족들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하느님으로 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개만도 못한 종족이라던 이방인들이 줄줄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갔지만 하느님의 장자격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나라 법정의 피고인석에 다들 앉아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결정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지속적 회개’였습니다.
회개는 평생 한번, 아니면 일생에 한번 하고 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매일 매 순간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일상적인 과제가 회개인 것입니다.
다행이도 아직 우리 모두에게는 기회가 있습니다.
아직 우리가 숨 쉬고 있다는 것, 이 세상에 두발로 서 있다는 것은 회개가 가능하다는 표시고
하느님 자비와 용서, 새 생명과 구원이 가능하다는 표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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