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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30일 _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10-30 조회수 : 323

하느님은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지혜 11,26)이시라고 지혜서는 말한다. 이 생명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의 육체적인 생명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의 자비와 사랑에 다가가는 사람들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이라면 영적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비와 사랑은 무엇보다도 죄의 용서를 통해 드러난다.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참으시고, 당신의 분노를 억제하시며 달래신다(지혜 11,15-21). 그분의 기쁨은 생명을 널리 베풀어주시는 데 있다. 하느님은 생명을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죄인들을 벌하고자 하지 않으신다. 사실 생명이라는 것은, 살게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특히 죄인들에게 “악에서 벗어나 주님을 믿게 할”(지혜 12,2) 시간과 기회를 제공할 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복음의 자캐오 이야기는 이러한 생명의 풍요로움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예리고는 북쪽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거의 반드시 쉬어 가는 곳이다. 그리고 팔레스티나 남동쪽에 있는 나라들과 가까이 있는 국경도시였기에 세관원들이 잘살 수 있었다. 복음에서는 돈 많은 세관장(2절)으로 자캐오를 소개하고 있다. 루카가 자캐오를 부자로 소개하는 것은 물론 당시의 세리들이 치부하여 잘 살았기 때문에 부자라고 소개를 하지만, 그렇게 강조하는 것은, 이보다 앞서 부자 청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재물에 매달렸던 청년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절했다(18,18-23). 그래서 예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18,25)라고 하셨다. 
 
그러나 자캐오에게는 어려운 일,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18,27 참조)이 일어나고 있음을 루카는 강조하고 있다. 이 회개의 과정이 예수님의 적극적인 사랑의 행위로 자캐오의 마음속에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그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나자렛의 예언자 예수에 관해 관심이 있었다. 그분이 기적을 행하시면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분임을 소문을 통해서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뵙고 싶은 마음을 가졌고, 자신이 키가 작아서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간 일 등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같은 행동은 자캐오가 사회적 계급적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람은 누가 조금만 도와주면 완전하게 자기 쇄신의 길을 갈 수 있다. 
 
그 도움을 바로 예수께서 주신다. 예수께서는 자캐오의 원을 아시고 그를 불러 내려오라고 하시며 그 집에 머물겠노라고 하신다. 그러자 세리 자캐오는 “얼른 나무에서 내려와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다.”(6절)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기쁜 마음과 세리에 대한 적개심이 담긴 마음이 대조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 하며 못마땅해하였다”(7절). 복음에는 여러 곳에서 예수께서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신다 비난한다(루가 5,30; 15,2). 그러나 그 경우에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다. 이번에는 군중들이 그러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군중들에게 있어서는 그가 부자였다는 것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독점하려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승부의 대상이 아니시다. 
 
이제 그리스도의 자비의 행위를 체험한 자캐오의 마음속에는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주겠습니다”(8절). 우리는 이렇게 뒤바뀐 상황을 본다. 인색하고 이기주의적이고 착취자였던 한 인간이 일순간 돈과 자기 자신을 떠나고 있다. 지금 그의 마음에는 다른 사람들 즉 가난한 사람들만이 들어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제자 모습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오늘 이 집은 구원을 받았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9절) 선언하셨다. 부정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부르심의 대상이며 회개하고 믿을 때 진정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자캐오는 예수께 대한 믿음과 변화하려는 확고한 의지 때문에 그를 죄인이라고 배척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10절). 예수께서 어떤 체계를 미리 세워놓으시고 그 안에서 사람들을 구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에게는 바리사이파 사람이든 세리든, 가난한 이든 부자이든, 히브리인이든 로마인이든 상관이 없다. 구원해야 하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사람들을 여러 계층으로 나누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억압하는 자와 억압을 받는 자, 선한 이와 악한 이 등으로 갈라놓으려 한다. 어떨 때는 복음을 팔아가며, 폭력까지도 동원하며 서로를 거스르고 있다. 
 
자캐오의 이야기는 그런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즉 매우 느리고 고달프지만, 내적 회개의 길을 추구하라고 하신다. 이 길을 통해서만이 압제자는 압제자기를 그치고 피압제자도 증오의 대상인 압제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불행을 겪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불의한 상황에 운명적으로 굴복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복음으로부터 주어지는 사랑의 힘으로 그 불의한 상황을 쳐부수라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도 그리스도인들이 종말론적 기다림의 분위기 속에서 살려고 한다면 최고의 사랑과 자기 쇄신의 의지를 실현해나가고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에게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주님에게서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2데살 1,12). 항상 하느님께로의 내적인 회개를 통하여, 그분이 베푸시는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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