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전례는 죽음의 실체와 그 죽음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확고한 희망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것은 죽음이 우리와 무관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현대인들은 많은 경우에 죽음을 우리의 삶과 멀리 두고, 자신이 그 죽음과는 관계가 없는 듯이 살고, 그 죽음에 저항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찾아오면 거의 절망에 떨어지고 만다. 이에 교회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의 생명이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 하느님의 생명에 연결되는 부활의 신비에 개방되어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8)
마카베오 하권의 내용은 초기 교회의 순교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마카베오의 형제들이라고 불렸던 칠 형제의 순교에 관한 이야기이다. 선조들의 법에 충실하기 위해 시민법을 따르지 말라고 용기를 주었던 어머니의 순교를 서술하고 있다. 그 젊은이들과 그 어머니의 확신은 미성숙한 사려 없는 행동이 아니며, 고고한 극기주의적 태도도 아니다. 지금은 잔악한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육신의 부활을 통해서 장차 생명을 되찾게 될 신비에 대한 깊은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아들들의 폭군에게 했던 말들이 이 희망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넷째 아들의 말은 이렇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2마카 7,14) 오늘 독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어머니의 신앙은 더욱더 감동적이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 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2마카 7,22-23) 이것은 단지 영혼의 불사불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도 신앙의 빛으로 피어나고 있는 모습이다.
복음: 루카 20,27-38: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
유다 사상에는 부활에 대해 대립적인 견해를 밝히는 두 부류가 있었다. 즉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였다. 사제계급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부활이 없다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루카 20,27; 사도 23,6-7).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한 여인이 일곱 남편을 맞게 되는 경우를 들어 예수께 질문을 한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33절)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거부하신다. 즉 그들이 저세상을 이 세상의 물질적 연장이나 반복처럼 상상하는 무지한 표현을 거부하신다. 그러면서 다가오는 세상의 현재와의 단절과 동시에 새로운 상황을 알려주신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34-36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삶의 모습이란, 부활 자체가 결혼의 목적성을 상실해 더 이상 자손을 낳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자손을 생산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손을 통해 가문을 잇고 대를 이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같아져서”(36절) 죽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36절)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게 되어있고 또 그 부활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에 연결되고 있다. 즉 부활로서만이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지금부터 하느님의 자녀이다. 지금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분의 생명에 결합하여 있으므로 장차 부활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카는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35절)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므로 모든 일상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로 가는 진실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이라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만이 마지막 부활을 믿을 수 있고 또 갈망할 수 있다.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 생물학적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이미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생명 체험의 승화로서 이해될 때, 믿음과 기쁨의 의미가 살아난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37절)이라고 한 것은 모세는 그 순간에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그 선조들과 생명의 관계에 있고, 신비스러운 친교를 통해 계속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과 우리를 만나게 하는 그분과의 일치된 생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38절) 즉 그리스도인은 현재 이 순간부터 그분과 사랑의 일치 속에 살아가야 하며, 그 일치가 죽음을 넘어 우리의 육신까지도 살려줄 마지막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기를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이렇게 종말론적 삶을 살도록 권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2테살 2,1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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