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보편성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뭘 해도 싫은 사람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삐딱한 사람들, 특히 남 잘되는 것 못 보는 사람들... 깊은 어둠속에 파묻혀 있어서 그렇습니다.
하느님, 선, 양심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눈에 뭔가 씌여 있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 시대 일부 유다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의 삐딱함은 도를 넘어섰습니다.
세례자 요한이건 예수님이건 누가 뭘 해도 미웠습니다.
사사건건 태클을 걸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깎아내리고 비판의 화살을 날렸습니다.
극단적 청빈주의자이자 고행의 대가인 세례자 요한이 백성들 앞에 등장하자 그의 뼈를 깎는 노력에 박수갈채를 보내기는커녕 생사람 잡는 소리를 해댑니다.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그리고 이윽고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십니다.
세례자 요한과는 달리 완전 자유분방하십니다. 만왕의 왕이시자 세상의 주인이시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죄와 죽음을 능가하시고 극복하신 예수님이시니 죄인들을 품어 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니 일부 지역의 제한적인 풍습이나 제도를 파기하시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도래로 인해 이제 이 세상은 기쁨의 세상, 완성의 세상, 구원의 세상이 되었으므로 이 은총의 때에 단식이나 통곡이나 슬픔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예수님이셨기에 유다인들이 그리도 경멸하던 세리들 사이에서 태연히 함께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다들 손가락질하며 멀리하던 죄인들의 절친한 친구가 되셨습니다.
이런 파격적이고 자유분방한, 한 마디로 개방적이고 관대한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언행은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습니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증오와 경멸에 찬 그들의 발언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 딱 들어맞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진정 삶을 즐길 줄 아셨습니다.
기회 닿을 때 마다 맛있게 드시고 마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서 있는 사람들과도 어울릴 줄 아셨습니다.
세상만사와 세상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향한 개방성을 갖춘 메시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과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일부 소수특권층의 것으로 여겨졌던 구원이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보편성이 확보가 된 것입니다.
누구든 하느님께로 돌아설 때 구원이 길은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구원의 기쁜 소식에서 제외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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