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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5일 _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2-05 조회수 : 316

복음: 마태 5,13-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 전례의 주제는 빛이다. 연중 제3주일에도 빛이 나오는데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지만, 오늘의 전례는 세상의 빛이 그분의 제자들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반영시켜 세상에서 그분의 정체를 계속 이어나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기 때문에 언행의 일치를 요청하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지난 주일의 산상수훈의 내용을 확대하고 있다. 마태오는 오늘의 말씀을 산상설교에 연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마음이 가난하고, 온유하고, 자비롭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신자들이 바로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 행복한 사람들의 생활은 새로운 실체 즉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하느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빛으로 변화된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빛으로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13-14절). 그리스도인의 본성을 소금과 빛으로 정의하고 있다. 소금이란 일반적으로 지혜를 뜻한다. 그런데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그러므로 소금과 빛의 개념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 이 관계는 기능적인 상대성에서 찾아야 한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고, 음식물이 썩지 않도록 보존하고,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예수께서도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13절) 하셨다. 복음에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였다. 이 땅의 개념은 세상(14절)과 일치하는 말로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신앙인들이 어떻게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커다란 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평범한 행동들을 통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면 이 행위가 모든 것에 새 맛을 주는 것이 아닐까?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쁨의 씨를 뿌리고 선과 이해의 향기를 뿜어내는 신자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삶의 맛과 의욕을 갖게 해줄 것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13절). 그런데 천연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릴 수 있겠는가? 자연의 영역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비극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그들 안에 구원의 맛과 그 맛을 전파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빛의 상징적 개념도 알아들을 수 있다. 이 빛의 비유는 산 위에 있는 마을의 비유(14절)와 등경 위에 얹어 비추게 하는(15절) 등불로 설명하고 있다. 빛이 제 기능을 할 수 있으려면 빛 자체로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어야 생명과 기쁨, 움직이고 행동하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빛의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 빛과 같이 온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14절)에 시선을 모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16절) 라고 결론을 내리고 계시다. 즉 행실을 통한 증거를 보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행실은 산상설교의 정신에 따르는 행실을 말한다. 즉 가난, 온유,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박해 중에도 평온을 잃지 않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온다. 이러한 의미로 오늘 복음은 교회의 선교 사명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소금과 빛이라는 존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교회가 세상에 봉사하고 또한 그 자체의 생명력과 사랑의 증거로써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빛 자체를 자신의 모습을 통해 세상에 비추어줄 수 있고 교회가 구원의 보편적 성사(교회 1.48)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서도 행실에 의한 증거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베푸는 자비의 행위 이것을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갈 것이다. 그 행위는 새벽 동이 트는 것과 같이 시작되어 대낮같이 밝아 온다고 말하고 있다. 즉, 사랑은 말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교회는 다른 사람을 위하고 세상을 위하는 사랑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사랑의 교회 모습을 되찾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며, 세상이 바라는 교회의 모습일 것이다. 이때 교회는 그의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10).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도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1코린 2,1-2).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그것이 무상으로 베풀어진 사랑의 선포이며,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의 선포이며, 그 나약하고 무기력한 행위로부터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1코린 2,4) 세상에 증거가 돼야 할 가장 큰 빛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으로써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때, 교회는 진정 산 위에 있는 마을과 같이, 온 집안의 식구들을 비추는 등경 위의 등불과 같이 자신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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