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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성지 신부님 글

양근성지에서 온 편지7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7-01 조회수 : 53

+  울게 하소서!


  양근성지 후원 가족 모두에게 7월 인사 올립니다. 무더운 여름 물 조심, 사람 조심, 음식 조심하며 시원하고 건강한 여름 나시길 기원합니다. 

  지난 5월 말에서 6월 초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 대축일을 보내고, 이제 매일의 반복되는 일상을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뵈옵는 연중시기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매일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 안에서 부활하시고 기뻐하시며 춤추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길 간절히 응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바로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돌을 치우신 것입니다.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돌은 예수님의 상처, 아픔, 고뇌 등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과 제자들의 야반도주로 상처 입고 매우 아파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간 지상에 머무르시면서 제자들에게 받은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십니다.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많이 갈구지 않았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 봅니다. 

왜냐하면 아프고 상처 입어 분노나 우울이 있는 경우에는 반드시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지 못하면 더 큰 트라우마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권위적이고 독재적인 아버지, 선생님, 신부님으로 인해서 알게 모르게 무의식 안에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전쟁 전후에 태어나신 부모님들의 자녀로서 감정 표현을 하지 못하고, 당위적이고, 지나친 완벽주의와 통제로 우리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의식 안에 많은 죄책감과 강박적인 사고가 가득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유아, 청소년기의 의존적 욕구의 박탈로 인해 공허감과 외로움을 느껴 많은 사람

들이 술과 마약 혹은 종교, 쇼핑 중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린 시절, 청소년기의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있는 내면의 아이와 이별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인생의 행복은 멀어져 갑니다. 내면의 아이와 이별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애도 기간이 필요합니다. 애도란 우는 것이고 나의 빼앗긴 자유를 위해 소리치고, 어린 시절 내면 아이를 위로해 주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저도 영화 파리넬리의 주제가 헨델의 ‘울게 하소서’를 들으며 삼사십대 소맥 많이 말아먹었습니다. 헨델의 ‘울게 하소서’ 가사를 적어 봅니다. 


『나를 울게 하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나를 울게 하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이 슬픔으로 고통의 사슬을 끊게 하소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울게 하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나를 울게 하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이렇게 애도하고 나면 부모님과 내가 살던 시대와 그리고 내면의 아이가 이해가 되고 슬프고, 아프고, 힘든 내면의 아이와 이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는 통곡의 벽이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이천 년의 방랑과 박해, 그리고 홀로코스트를 이겨낸 힘이 통곡의 벽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도 나를 평가하고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도 나를 심판하고 평가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더이상 내 인생의 특별한 경험을 부끄러워하며 괴로워하고, 숨기고, 도망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태어나면 죽고, 만나면 헤어지고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부부간에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상호 존중의 관계로 나아가고 더이상 아들과 딸을 정서적인 남편, 정서적인 아내로 만들지 마십시오. 아이들은 숨이 막혀 거의 죽기 일보 직전입니다. 

 결혼의 본질은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 부모, 형제, 자매를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개인,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 홀로 머무르고, 자기 자신의 삶을 살고, 세상에 사는 존재 이유를 떠올리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조 쿠더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사랑을 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일생동안 만나는 모든 사람 중에서 당신을 떠나지 않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다.”

  그렇습니다. 자기 존중, 자기 사랑만이 유일한 삶의 이유와 목적을 배우고 실행할 수 있는 길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을 보내며 우리는 육체가 아니고, 생각이 아니고, 감정이 아닌 ‘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영’임을 아는 것은 내면의 주시자 때문이고 이 내면의 주시자와 하느님 그리고 나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자크라캉’이라는 심리학자 겸 철학자는 자신의 욕망이론을 통해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이야기합니다. 상상계란 마음을 통한 나의 상상 세계를 의미하고, 상징계란 언어 그 자체와 언어의 구조에 기초해서 이미 만들어진 세계인데 ‘비트겐슈타인’식으로 말하자면 규칙의 세계입니다. 실재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 그 자체입니다. ‘칸트’는 실재계를 물 자체라고 불렀습니다. 물 자체란 존재하지만 인식하기 어렵고, 볼 수 없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실제로 존재하는 실재계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인간의 감각으로 실재계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려운가요? 어려울 거 하나도 없습니다. 상상계는 마음의 세계로 매트릭스이고, 환영이며, 상징계는 물질세계이고, 실재계는 영과 함께하는 다시 말해 하느님과 함께하는 세계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우울하고, 걱정하고, 상처받는 이유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실재계를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주 묵상하고, 관상기도를 하면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내가 이 세상에 사는 존재 이유를 알았으면 합니다. 

  어느 해 봄날 심수봉님의 ‘백만송이 장미’라는 노래를 들으며 엉엉 울었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왜 내가 아픈지, 왜 내가 신부로 살아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다시 말해 내 삶의 존재 이유를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 16장 28절) 이것이 인생이고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루카 24장 50~51절)

 만나고 헤어지고 이것이 인생이고 삶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별하는 사람, 이별하는 사건, 내면의 아이를 축복해주며 남은 나의 인생 홀로 또 함께하며 멋지게 그려갔으면 합니다.


2022년 7월 지구별 사랑 가득한 정원에서.  

양근성지 전담 권일수 요셉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