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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농성지 신부님 글

어농지기 이야기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8-01 조회수 : 182

8년 전. 청소년과 청년 사목을 담당하면서 처음으로 참가한 프로그램이 수원교구 청년 도보 성지순례였다. 여름 방학을 이용해 신청한 대학생들, 직장에 휴가를 내고 참가한 직장인들, 휴학 중이거나 이직을 준비하는 청년들 등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한 여름 더위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무장하고 89일의 도보순례를 시작했다.

순례 코스는 안양의 수리산 성지를 출발하여 성남 모란역 근처의 성남동 성당’, ‘남한산성을 거쳐 광주에 위치한 천진암 성지’, ‘앵자봉을 넘어 용문성당’, ‘양평성당을 지나 이포대교를 건너 이천성당에 도착, 이천에 위치한 어농성지단내성지를 지나 용인 양지성당’, ‘은이성지미리내 성지를 거쳐 요당리 성지도착, 그리고 마지막 날 수원교구청까지 걸어가서 주교님과 함께 파견미사를 봉헌했다.

도보 첫 날부터 한여름 더위로 온 몸이 뜨거워졌다가, 이튿날 남한산성에 올라갈 때는 폭풍우를 만나 비바람과 싸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9시가 넘어 천진암 근처 야영장에 도착을 했고, 이 날 밤 같은 조 청년 중 한명은 너무 무리해서 응급실에 갔다가 깁스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서 도착한 최종 목적지에서 많은 젊은이들의 땀, 노력, 도전, 사랑, 열정의 감동을 체험할 수 있었다.

30대의 혈기왕성한 나였지만 도보순례는 참 힘이 들었다. 솔직히 젊은이 담당 사목을 하지 않았다면 평생 체험하지 않았을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신부이니까, 청소년과 청년을 담당하게 되었으니까, 청년들을 위해 한 명의 사제는 끝까지 함께 걸어줘야 하니까 등등 많은 이유들을 찾고 생각하며 걸었지만 그래도 힘든 건 사실이다.

 

1주일 전. 19기 청년 도보 순례단이 우리 어농성지에 도착을 했다. 가장 더운 7월 마지막 주 삼복더위의 한 복판에 죽산성지에서 어농까지 걸어온 것이었다. 점심밥을 먹는 순례단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초점 잃은 눈빛에 살기 위해 밥을 넘기는 청년들, 너무 힘들어서 식사를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힘들어 하는 청년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함께 걸어주는 일이다. 나는 오랜만에 함께 걷기로 했다. 어농성지에서 단내성지를 지나 양지에 위치한 교구 영성 수련관까지 함께 걸었다.

더위에 고통스러워하는 참가자들, 참고로 이날 서울의 온도는 36.1도 까지 올랐고 폭염주의보가 발령된 날이었다. 자신의 시간을 힘들게 투자한 이들, 참가비까지 내고 필요한 장비들을 구입하여 걷고 있는 이들, 대부분 또래 친구들은 집에서 에어컨 켜고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고 있을 시간에, 수많은 직장인들은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여름휴가를 떠나 즐기고 있을 시기에 이들은 왜 사서 고생을 하며 힘들게 걷고 있는 것일까하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너무 힘들어서 이야기조차 하지 않으며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고 걷는 참가자들, 그렇게 발에 물집이 잡혀 고통을 느끼고 엄청난 열기로 숨조차 편하게 쉬기 어려운 시간들을 지나 참가자들과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을 했다. 나는 반나절 함께 했지만 그 시간을 걷고 나서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그들이 왜 길 위에 있는지를...

 

우리는 늘 많은 것들을 채우려고 한다. 특히 사람들은 돈을 좋아한다. 돈으로 더 많은 것들을 누리고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집, , , 보석 등등 돈만 있으면 손에 쥘 수 있는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 인기를 받고 또 받으려는 마음도 크다. 내가 많이 가지고 있을 때 세상은 나를 인정해 주고 사람들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매일 채우기 위해 고생하고 버틴다.

그런데 반대로 비우려고 할 때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들이다. 몸도 비울 때 가볍고 건강해진다. 내 마음을 채우기보다 비우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은 비울수록 단순함의 기쁨과 평화가 채워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도보순례를 참가한 이들은 비우려고 애를 쓰는 젊은이들이었다. 시간을, 돈을, 편안함을 내려놓고 예수님 한분만 의지하며 비우고 또 비워내기 위해 길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어농지기 박상호 바실리오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