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근 성지에서 온 편지 6
+ 슬기로운 바보 예수님
사랑하고 존경하는 양근성지 후원 가족 모두에게 6월 인사 올립니다. 녹음이 짙어가는 6월, 맑고 밝게 빛나는 한 달 되시길 바랍니다.
먼저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지난 5월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후임으로 미국인이고, ‘아우구스티노’ 회 수도자이며, 페루에서 20여 년간 사목하신 가톨릭교회 267대 교황 레오 14세가 탄생하셨습니다. 교황님의 영, 육 간의 건강을 위해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교황 명 ‘레오’는 라틴어로 사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르코 복음의 상징 동물인 사자는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 즉, 구도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요한 묵시록에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하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제자인 고해 신부도 이름이 레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레오 교황님은 수도자이고 구도자이며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뒤를 잇는 예수님의 참 제자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축하와 기도를 보냅니다.
6월, 예수성심성월은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달’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한마디로 슬기로운 바보, 즉 스스로 고요히 머물며 누구와 같지 않고 독특하게 자신의 삶을 살며 이심전심으로 소통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보는 흔히 현대의 이단아로 불립니다. 이단은 본래 선택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이단아는 자유로운 선택권을 쥐고 있는 자입니다. 그는 전통에서 이탈할 용기가 있습니다. 그는 순응의 압박을 용감하게 떨쳐 버립니다. 이단아로서의 바보는 합의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형상입니다. 그는 아웃사이더[outsider]의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순응의 압박이 점점 더 강화 되어가는 오늘날 우리는 이단아의 마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흔히, 바보짓은 신자유주의적 지배 권력과 그것이 강제하는 총체적 커뮤니케이션과 총체적 감시에 반기를 듭니다. 바보는 소통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바보는 소통 불가능한 것으로 소통합니다. 그는 침묵의 장막 속으로 들어갑니다. 바보짓을 통해 침묵과 고요, 고독이 있는 자유로운 공간, 정말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집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이미 1995년에 이러한 침묵의 정치를 선언합니다. 그것은 곧 커뮤니케이션과 의사 표현을 강요하다시피 하는 신자유주의적 심리 정치에 대한 반대 선언입니다. 들뢰즈는 “오늘날의 난관은 더 이상 우리가 자유롭게 말할 수 없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뭔가 말할 것을 찾을 수 있는 자유로운 고독과 침묵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이제 억압적 세력은 더 이상 우리의 의견 표명을 막지 않으며, 오히려 의견을 말하도록 강요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한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대단한 해방인가요! 우리는 그럴 때만 점점 더 희귀해지는 어떤 것, 그러니까 과연 말해질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창조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지혜로운 바보는 완전히 다른 지식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는 수평적인 차원을 넘어, 더 고차원적인 영역으로 상승합니다. 애초에 자폐증 환자를 의미했던 ‘지혜로운 바보’는 그 개념적 의미를 덜어내고 어쩌면 그저 끼리끼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결합 되어 있는 모험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보짓은 순결한 공간, 사유가 완전히 새로운 언어에 이르기 위해 필요로 하는 저 먼 곳을 열어 줍니다. 지혜로운 바보는 등주(힘차게 올라감), 고행승(기둥 위에서 금욕 생활을 실천하는 동방교회의 수도승)처럼 먼 곳을 보고 삽니다. 수직적 긴장이 그를 더 고차원적인 합일에 이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그는 사건들, 미래에서 온 신호를 예민하게 받아들입니다.
들뢰즈는 ‘내재성:하나의 삶...’이란 글에서 내재성을 행복의 공식으로 끌어 올립니다. 그는 “우리는 순수한 내재성이란 하나의 삶이며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삶 속의 내재성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어떤것 속에도 있지 않은 내재적인 것으로서, 그 자체가 하나의 삶이다. 하나의 삶은 내재성의 내재성, 절대적 내재성이다. 즉 그것은 완전한 능력, 완전한 행복이다.”라고 말합니다. 내재성은 어떤 다른 것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에만 내재하기 때문에 그 어떤 것 속에도 있지 않은 내재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내재성의 내재성’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 무엇에도 예속되지 않습니다.
순수한 내재성은 심리화 되지도, 예속화되지도 않는 공허, 즉 공입니다. 내재적 삶은 비어 있는 만큼 더 가볍고, 더 풍부하고, 더 자유롭습니다. 개별성이나 주체성이 아니라 독특함, 특이성이 바보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바보는 아직 개인도, 인격도 아닌 아기들과 근본적으로 닮아있습니다. 개인적 속성이 아니라 비인격적 사건이 아기들의 존재를 이루는 핵심입니다. 그래서 아기들은 내재적인 삶으로 충만합니다. 그러한 삶은 순수한 능력이며 심지어 고통과 무상함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슬기로운 바보인 예수님은 아기들을 자주 안아주시며 축복해 주시고, 아기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내재적인 삶이란 어린 아기처럼 욕심, 분노, 질투가 없는 순수함,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이고,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6월 한 달, 내재적인 삶에 충분히 머무르시길 두 손 모아기도 보냅니다. 필요할 때 꺼내 쓰세요. 내재적인 마음은 우리 모두 안에 있습니다.
2025년 6월 슬기로운 바보 예수님과 함께.
양근성지 전담 권일수 요셉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