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양근성지 후원 가족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아울러 양근 성지에 보내주신 사랑과 정성에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2026년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개인적으로 사제 생활 ‘30년’차입니다. 언제 30년이오나 했는데 이제 바로 앞에 있습니다. 지난 사제의 생활은 한마디로 거북이의 삶이었습니다. 신부 생활 1년 차부터 정신적 육체적으로 어려움은 있었으나 하느님의 큰 자비하심으로 이를 극복하며 오늘 하루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하느님의 은총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큰절 올려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원래 머리가 나쁩니다. 그러다 보니 무엇인가를 배울 때 남들보다 두 세배의 시간이 더 걸립니다. 하지만 제가 추구하는 배움은 ‘전체를 보자’는 주의이기에 하나씩 하나씩 단계를 밟아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한 저자의 사상이나 철학에 대해 공부할 때는 무식하게 최소 다섯 권의 책을 봅니다.
총명한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든, 혹은 공부를 하든 빨리 적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머리가 나빠서 끈기 있게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제 앞에 달리고 있던 친구들도 정지를 합니다. 조금 늦더라도 언젠가 시간이 지나고 나면 같은 자리 이상에 서 있는 걸 알게 됩니다.
거북이로 사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업의 본질입니다. 저는 어떤 일을 할 때,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제로 적응하고 사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솔직히 말해 많이 방황했고, 고통받고, 외로웠고,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승리라는 문을 향해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걸어 나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머리가 나쁘고 둔한 사람들은 대개 끈기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성모님처럼 인내할 줄 안다는 것이고 예수님처럼 의연하여 의지가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끈기는 삶의 방식일 뿐 노력의 결과 따위가 아닙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합니다. 자꾸 몸이 고생하다 보면 당연히 체력이 남들보다 좋아집니다. 그래서 거북이들은 느리지만 멀리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거북이가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걸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모두가 지쳤을 때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면 언젠가 토끼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죽는 날까지 거북이처럼 내 인생의 종점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것입니다.
세상에는 섹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마치 아웃포커스 기법이 사용된 듯 주위는 흐릿한데 혼자서 선명한 빛을 유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디를 가든 돋보이는,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은 흔히 좋은 ‘척추’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이 사람들의 등 골격 구조가 특별하다는 것이 아닌 줏대, 신념, 소신이 척추처럼 올곧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흐릿흐릿 엇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강렬한 ‘색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 생기고 못 생기고를 떠나, 마주 대하는 것만으로 사람을 홀리는 듯한 매력을 풍깁니다.
제가 인간적 매력을 느끼고 닮고 싶은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긍지’입니다. 긍지는 곧 무언가를 믿음으로써 가지는 당당함입니다. 그 믿음의 대상은 자신의 능력, 행동, 신념 등 다양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에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만이 나올 수 있는 그 당당함의 아우라가 특별함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선함’입니다. 옳음을 추구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친절을 베풀 줄 아는 사람에게서 ‘여유’를 느낍니다. 바쁘고 지치는 일상 속에서 타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넬 수 있는 사람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 타인의 기분을 위해 항상 웃음으로 대하는 사람들, 이들이 진정 여유로운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공통점은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줏대 있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확고한 분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학문이건, 전문 기술이건 간에 꿋꿋하게 한 분야의 일을 걸어온 사람들은 진정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특정 분야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경험은 범부가 가질 수 없는 통찰력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이고 지혜를 사랑하는 철인인 것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행복한 연말연시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좋은 척추를 가진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양근 성지 후원 가족인 거북이는 오늘도 내일도 저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수행해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5년 12월 매일 걷는 거북이
양근성지 전담 권일수 요셉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