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1일 발대미사를 시작으로 장장 250km에 이르는 ‘제8기 청년도보성지순례’가 발걸음을 뗐다. 참가인원 75명 중에는 교구 신부들과 수녀, 그리고 고등학생 4명이 포함됐다. 8박9일의 일정 속에 진행된 도보성지순례는 충남 보령에 있는 갈매못성지에서 시작해 해미성지, 솔뫼성지, 요당리성지 등을 돌아보고 19일 오후 2시 교구청에서 교구장 최덕기 주교 주례로 파견미사를 봉헌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비.
도보성지순례 첫 날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며칠째 계속되는 더위를 식혀줄 단비가 될지 순례일정을 힘들게 할 궂은비가 될지 몰랐다. 다행히도 출발시간이 되자 비가 멎었다. 하지만 온 몸을 감싸는 비온 뒤의 습한 기운은 내딛는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악.
한걸음 한걸음 악을 쓰며 걸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연이어 걷는 동안 발바닥이 펄떡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도로변으로 걷기 때문에 안전상 한 줄로 걸어야 해서 이 고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도 없다. 철저히 혼자서 가야 한다.
열
뜨거운 태양은 순례를 더욱 힘들게 했다. 땡볕에 달궈진 아스팔트는 내리쬐는 열기를 그대로 반사시켰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 서있기만 해도 어지러웠다. 그동안 에어컨 바람 밑에서 나태하게 지냈던 지난날이 필름처럼 스쳤다. 순간 이런 땡볕에서도 묵묵히 일하고 계실 아버지 어머니가 생각났다. 묵주알을 돌리기 시작했다. ‘저희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벗.
묵주기도를 하며 발걸음을 떼는 순간 바람이 불었다.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지만 순간의 더위를 잊을 만큼 시원하고 고마운 바람이었다. 한결 기분이 좋아져 웃고 있는데, 앞에서 걷고 있던 사람이 뒤를 돌아보고 미소를 짓는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 땡볕에 걷고 있는 이가 나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 새삼 고마웠다. 이제 알았다. 난 지금 혼자 걷는 것이 아니란 것을. 선조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걸었을 이 길을 함께 걷는, 우리는 동료다.
길.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이 길. 처음에는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던 이 길 위에서 수없이 많은 생각들을 읊조렸다. 선조들은 이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가 찾아가는 많은 성지에서는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자신의 믿음을 위해, 후손들의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름 모를 순교자들을 움직인 건 어떤 힘이었을까. 내가 그 시대로 돌아간다면 나는 하느님을 증거하기 위해 내 목숨을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 삶의 어디쯤에 신앙이 자리하고 있었나. 내 마음 속에 하느님을 모실 자리를 비워두긴 했던가. 내 안에 임하신 하느님을 행복하게 해드렸던가. 아니, 노력이라도 했던가….
뜻
순교자들의 힘으로 내 나라 대한민국에 떳떳하게 하느님을 모실 수 있다. 하느님을 알고, 신앙을 갖는 것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자랑스럽다. 숭고한 한국 천주교의 역사다. 지금 우리는 걸어서 성지를 찾아 참배하고, 그 땅에 얽힌 무수한 신앙의 발자취와 선조들의 뜻에 귀 기울인다. 이렇게라도 순교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알 수 있기를 바라며….
이상희 기자 bsng@catholictimes.org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