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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미리내 성지 학술 심포지엄

작성자 : 이상숙 작성일 : 2008-10-20 조회수 : 791

 10월 17일과 18일 이틀에 걸쳐 미리내성지 학술 심포지엄이 ‘한국 순교자 현양의 근원지, 미리내 성지의 어제와 오늘’이란 주제로 개최됐다.

미리내성지가 주최하고 수원교구 수원교회사연구소에서 주관한 이번 심포지엄은 첫째날과 둘째날 각각 1부(페레올 주교, 김대건 신부와 미리내 성지)와 2부(미리내본당, 강도영 신부와 김대건 신부 현양)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호남교회사연구소 서종태 연구실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번 심포지엄은 첫째날 수원교회사연구소 소장 정종득 신부의 기조강연으로 시작됐다.

 정종득 신부는 ‘미리내 성지의 교회사적 의의’를 주제로 “미리내 성지가 현재와 같은 성지로 발전하게 된 것은 김대건 신부의 묘소를 미리내에 조성해 김대건 신부에 대한 신자들의 사적 공경이 이뤄지면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며 “1976년 무명순교자 16위의 묘가 미리내에 이장되어 온 과정에서 성지로서 발전되온 계기를 발견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선교하기에 열악한 환경 안에서 선교 사제들의 쉼터로서 역할한 역사적 면모도 돌아볼 수 있다”고 전했다. 
 기조강연에 이어 첫째날에는 ▲제1주제 - 중국 체류시기 페레올 주교의 행적과 활동(조현범 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제2주제 - 페레올 주교이 입국 후 사목 활동 (원재연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제3주제 - 김대건 신부 현양운동의 새로운 모색 (서종태 호남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등 총 3가지 주제 발표가 있었다.
 
 
 
 
 
 
 
 제1주제에서 조현범 연구원은 페레올 주교의 생애와 선교사로서의 활동 중에서도 특히 조선 입국 준비 시기에 중국 만주 일대를 배경으로 펼친 그의 행적과 활동을 주로 다루었다. 조현범 연구원은 하느님의 선교 사업에 헌신하고자 페레올 주교가 겪은 까다롭고 험난한 조선 입국 과정과 조선에서의 연이은 박해들로 인한 피신과 투병생활로 점철된 그의 인생을 조명했다.

 이어 페레올 주교의 입국 후 사목활동을 다룬 원재연 박사는 “한국 천주교회 제3대 감목 주교인 페레올 주교의 조선 입국 후 활동 내용은 ▲김대건 신부의 순교(1846.9)를 전후한 시점에서 중점적으로 추진된 ‘한국 교회 순교자 현양 활동’ ▲병오박해로 인한 위기 극복 후 재개된 선교 사목활동(공소순방 등) ▲신학생 교육을 통한 한국인 사제 양성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원재연 박사는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 현양운동을 최초로 시작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를 최양업 신부에 비견하는 '땀의 순교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칭했다. 또한 “최양업 신부를 비롯한 당시 동료 사제들과의 관계를 살펴봤을 때 페레올 주교가 훈훈한 정을 지닌 인격의 소유자였음에서 긍정적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하였다.
 
 이날 제3주제 ‘김대건 신부 현양운동의 새로운 모색’을 발표한 서종태 연구실장은 “한국 교회에서는 순교자 현양이 주로 ‘순교’에 초점을 맞춰 이뤄지고 있는데 순교 못지 않게 순교자들의 활동과 업적도 순교자 현양에 있어 중히 다뤄야할 부분”이라며 김대건 신부에 대한 현양에 있어 소홀히 다뤄온 그의 활동과 업적에 대해 주목했다.
 서종태 연구실장은 “1842년 조선 입국을 위해 김대건과 최양업이 (당시 신학생 신분) 에리곤 호를 타고 여행하는 동안에 김대건 신부가 경유 지역을 둘러보면서 견문을 넓히고 통역관으로 활동했던 경험은 훗날 그가 입국로를 개척하고 선교사들을 영입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또 “1839년 두절된 조선교회의 연락망을 극적으로 복원하는 중요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북방 입국로 개척을 완수해 페레올 주교의 신임을 얻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어 “김대건 신부의 대담한 용기와 지혜로 조선 교회가 두절된 연락망을 복원하고 새로운 선교사들을 맞아 들일 수 있엇다”며 “김대건 신부가 최양업 신부보다 먼저 사제품을 받은 것은 그러한 그의 용기와 지혜를 높이 평가 받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고 평했다.

 심포지엄 둘째 날인 18일에는 한국 교회사 안에서 미리내 본당이 갖는 가치와 의의를 밝히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날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소장은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어 1895년 조선의 3번째 사제로 서품된 이 중 한명인 ‘강도영 신부’와 ‘김대건 신부 현양’을 다루었다. 강도영 신부는 당시 약현 성요셉성당(현 중림동성당)에서 정규하, 강섬삼과 함께 페레올 주교에 의해 서품된 사제로 33년간 미리내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재임하다가 선종 뒤 그곳에 묻혔다.

차기진 소장은 “마리내 본당 설립과 정착 과정이 전 생애를 미리내 본당과 함께한 강도영 신부의 일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라며 강도영 신부의 생애를 조명하는 한편, 미리내 성당 건립과 해성학원 설립, 또 가장 두드러진 성과로 손꼽히는 김대건 신부 현양활동과 기념 경당 건립 등 그의 업적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강도영 신부는 1907년 8월 현재의 미리내 성당을 자연석으로 완공 축성했으며 교리학교와 애국계몽운동으로서의 초등학교 성격을 함께 지닌 ‘해성학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특히 미리내에 부임하면서부터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의 현양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던 중 김대건 신부 기념관 건립이 결정되자 건립 장소가 미리내로 결정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고 그 결과 1927년 미리내에 기념 경당이 완공되고 1928년 축성되기까지 과정을 이끌었다.

차기진 소장은 “이렇게 건립된 경당이 현재의 미리내 성지가 있게 한 출발점이 됐다”고 그의 업적을 평가했다.
 제2주제를 맡은 수원교회사 연구소 이석원 연구원은 “한국 교회 내에서 미리내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모신 성지이자 순교자 현양운동 발원지로는 잘 알려졌지만, 미리내 본당이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수원교구)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며 ▲용인 지방 중심으로 광범위한 지역에 복음전파와 사목활동의 중심지로 역할 했던 점 ▲박해시기 접근이 쉽지 않은 산간 경계지역에 성 김대건 신부․페레올 주교의 유해를 모신 거룩한 땅에 산다는 자부심과 굳건한 신앙을 바탕으로 교우촌을 일궈낸 점 ▲개항기 이래 급변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왕림본당과 사목과 전교의 중심지로 역할한 점 등을 들어 미리내 본당이 가진 교회사적 위상과 가치를 설명했다. 또 이석원 연구원은 “미리내가 성지이자 본당으로서 새로운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110년이 넘는 신앙의 전통과 본당 역사의 자원을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라는 견해도 덧붙였다.

 2004년 처음 시작된 수원교회사 연구소 주관의 심포지엄은 올해로 4번째를 맞이했다. 이 심포지엄은 교구 내 성지를 중심으로 한 수원교구의 교회사 연구, 나아가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길잡이로서 역할하고 있으며, 교회사 전문가들의 깊이 있는 연구 토론의 장이자 각 성지의 현양사업들에 도움이 될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교구 설정 40주년인 2003년 설립된 수원교회사연구소는,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신앙을 역사학의 측면에서 체계적으로 연구하며 매년 학술심포지엄은 물론 특별강연, 동호회 운영을 통한 교회사 세미나, 고전강독, 교구 내 본당이나 성지의 역사 편찬 작업 등을 펼치며 한국 가톨릭 신앙의 확립과 가톨릭 문화의 풍요로움을 보급하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이상숙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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