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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이성효 주교 인터뷰] 그리스도와 함께, 믿음, 소망, 사랑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1-02-09 조회수 : 862
   지난 2월 7일 수원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된 이성효 리노 주교님께서 2월 8일 17시 수원교구청에서 기자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기자 간담회에는 천주교 관련 언론을 비롯한 일반 언론의 기자들이 참석해, 교세와 신자 수 등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 천주교에서 중요한 위치로 성장한 수원교구의 위상을 실감케 했습니다.
   교구 홍보전산실에서는 지상 인터뷰를 통해 교구민들에게 이성효 주교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전해드리려 합니다.
   이성효 주교님은 이번 인터뷰를 통해 ▲임명 후와 현재의 심경 ▲서울대학교대학원 석사(전자공학)를 마치고 사제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경위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삶과 학문을 자신의 삶과 연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독일 트리어대학교 신학대학원 교부학 석사·프랑스 파리 가톨릭대학교 교부학 박사).
   또한 ▲사제로서의 삶과 모또 ▲수원가톨릭신학교 교수 시절의 소회 ▲보좌주교로서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설정 등, 학자이자 사제이며 한 인간으로서의 현재 모습과 향후 다짐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2월 8일 진행된 인터뷰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문답형식으로 게재합니다.
 


   이성효 리노 주교(이하 이 주교) : 어제(2월 7일 주교임명 직후) 정신없이 인터뷰를 하면서 기자 분들께서 제게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제가 얼떨떨하다고 대답했었죠. 그걸 다시 반복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오늘 주교복을 맞추러 갔는데, 수녀님들이 ‘주교님’하고 불러서 누굴 얘기하나 했습니다. 그렇게 아직까지 남의 옷을 입은 것 같고 익숙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1. 언제, 어디에서 임명 소식을 들었는지요.(혹은 최근의 근황), 들었을 당시의 소감이 어떠하셨나요?
   이 주교 :
사실 저는 안식년을 보내는 중이었습니다. 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할 때 항상 부족한 것이 개인적인 연구시간이라, ‘안식년을 보내며 미처 하지 못한 연구를 했으면 좋겠다’ 그런 심정으로 안식년을 보내고 있던 차에, 갑작스럽게 임명 소식을 들었습니다.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완전히 진공상태와 같았습니다. 마치 코린토 전서에서 바오로사도가 처음 코린토인들에게 다가갔을 때, “나는 약했고, 두렵고, 몹시 떨렸습니다”라고 했던 것처럼, 저도 처음에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의 약함 때문에 매우 두렵고 떨렸습니다.
 
   마침 그 전날 저와 함께 교부학을 공부하던 그룹원들과 함께 미사를 드렸어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넉넉한 마음’에 대해 강론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내 입으로 이야기했던 그것이, 나에게 다시 한 번 작용을 하다보니, 내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천신만고 끝에 세례를 받고 세상의 명예나 교수 직분과 같은 세속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혈혈단신으로 내려갑니다.
고향으로 내려가서 자신은 수도원을 지어서 그곳에서 평생 하느님을 찬양하며 살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 히뽀 주교님이 아우구스티노성인을 추천하여 갑작스레 사제서품을 줍니다. 그러자 그때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뭐라고 고백을 하냐하면, “나는 수도원을 건설해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살 결심을 했었다. 그런데, 나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지금 발레리우스 주교님으로부터 내가 서품을 받게 되니, 이 서품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뜻을 찾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로 뛰어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그 말씀에서 위로를 얻고, 한 걸음 한 걸음 이 길에 감히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2. 오랜 시간 공부를 하시고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교수로 사제의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지나온 삶을 반추해 볼 때, 가장 힘든 일과 보람 있었던 일을 말씀해 주신다면?
   이 주교 :
가장 힘든 일은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의 성소를 심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저 학생들을 부르셨는데, 어쨌든 저에게 주어진 직분은 저 학생들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것이었으니까요. 부족한 내가 어떻게 하나…, 그러한 일들은 피하고 싶고 그냥 신학생들과 잘 지내고만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성소심의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가장 기쁜 일은 수원가톨릭대학교는 수원교구, 춘천교구, 원주교구 세 개 교구 신학생들과 수도원, 한국외방선교회 신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학생들이 소정의 교육을 잘 이수하여 사제로 서품되었을 때가 가장 보람 있고 기뻤습니다.
 
3. 사제로, 교수로 살아오시면서 삶의 지향이나 좌우명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 주교 :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이런 표현을 씁니다. “너를 던져라. 너를 던져라. 좋으신 하느님께 왜 너를 못던지느냐.” 라틴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쓰레기통에 쳐 박을 때’의 의미, 그러니까 그 좋으신 하느님께 너를 그냥 쳐 박으라 하는 표현들인데, 그 표현이 고백록에 나옵니다. 좌우명이라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그런 것들이 알게 모르게 제 안에 쌓여서 저에게 큰 영향을 주고 어떤 어려움이 닥치면 그 어려움에 저를 그냥 던지는,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4. 혹시 교구장 주교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으신가요?
   이 주교 :
제가 신학생 때 독일 유학시절에, 그때 지금의 이용훈 주교님께서는 로마에서 거의 박사학위 끝마치실 때였습니다. 그때야 거의 못 뵙고 명단에서 교구장 주교님 이름을 확인했던 정도였습니다.
   이후에 파리로 다시 가서 박사학위 준비할 때, 교구장 주교님께서 안식년 차 프랑스에 오셨습니다. 그때 같이 참 좋은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룩셈부르크 공원을 함께 다니며 음식을 나누고…. 그 이후 제가 오산본당에 있을 때 신학교 강의를 나간 적이 있는데, 그때 신학교 총장님이셨습니다. 그런 인연 그 이후에는 항상 주교님으로서 수원가톨릭대학교에 오셨을 때 저희들이 알현하고 그랬죠.
 
5. 수원교구는 현재 교구 설정 50주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수원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이하는 수원교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 혹은 설정을 준비하면서 중점을 둬야하는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주교 :
살펴보니까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 교구에서 준비를 하고 있더군요. 미래정책위원회, 기념사업위원회, 기획홍보위원회. 제 생각으로는 이 위원회가 잘해나갈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 주는 게 제 할 일이 아닌가 합니다.
 
6. 보좌주교로서 앞으로 교구장 주교님을 보필하여 교구 사제와 교구민들의 중개자 역할을 하셔야 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어떤 모습의 중개자가 되고 싶으신가요?
   이 주교 :
중개자, 결코 제가 하는 것이 아니죠. 우리 중개자는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그러나 중개할 필요가 생긴다면 저는 더 많이 그리스도에게 말씀을 드릴 생각입니다. 기도가 더 많이 필요하겠죠.
   사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그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하느님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니까 중개 역할을 하기 위해서 하느님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올바른 역할은 하느님께 말을 많이 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라고 생각을 해봅니다.
 
7. 2009년 이후 많은 신자들이 보좌주교님의 탄생을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해 주신 교구민들에게 한 말씀을 해 주십시오.
   이 주교 :
2009년이 아마 “사제성화의 해” 였을 겁니다. 그래서 특히 그 기간 동안 교구민들이 사제단을 위해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해 주셨는지 제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사제를 위해 기도와 희생을 아끼지 않은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아우구스티노성인의 말씀이 하나 떠오릅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저는 한명의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저는 주교입니다.” 여러분을 위했을 때, 내가 주교입니다.
   정말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일생을 보면 그것이 빈말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렇게 저 또한 마찬가지로, 제가 평소 사숙하고 있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처럼 살고 싶습니다.
 
8. 사제수품 때 사제로서의 모토를 소개해주시고, 주교님으로서 모토를 결정하셔야하는데 사제수품 때의 모토와 다른 모토가 결정이 되었다면 어떤 내용이신지?
   이 주교 :
사제수품 때를 이야기하면, 부끄럽습니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와서 바로 사제가 되어 준비할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제 기억으로 날짜가 목요일이었기 때문에, 목요일 아침기도, 점심기도, 저녁기도로 시편을 읽으면서 3개 좋은 구절을 골랐어요. 그걸 가지고 당시 지동성당의 식복사 자매님께 가장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 달라고 했더니 골라주셨습니다.[웃음] 그게 모토입니다.
    “내 영혼 당신을 노래하여 잠잠치 말라 하심이니” 성무일도 목요일 편에 보면 나옵니다. 시편 몇 편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이번에 문장 준비에 대해서는, 새로운 것보다도, 제가 이 길에 들어서면서 마음속에 많이 삭혔던 것, 내가 안고 오랫동안 고민했던 것. 그것을 가지고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지금 정확히 결정된 건 아니지만, 제가 석사논문 끝마치면서 생각했던 것이 있어요.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쓴 ‘라우렌시오에게 보낸 믿음, 희망, 사랑’ 이라는 부제를 가진 소책자인데, 거기의 2-7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믿음은 믿게 하고 희망과 사랑은 기도한다. 믿음이 없으면 희망과 사랑도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믿음도 기도한다.” 그런 문장이 있었어요. 그 문장에 무슨 뜻이 있을까? 그 간단한 문장을 가지고 한 달 동안 고민을 했지요. 그러다가 논문 결론으로 “이것이 아우구스티노의 교회론이다”라고 했어요.
    사실은 그것이, 제가 인생 살아오는 동안 신학 공부했던 거의 모든 시간동안 묵상했던 그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믿음, 소망, 사랑”
 
   9. 주교님께서는 말씀하실 때 아우구스티노성인을 많이 언급하시는데, 주교님께서 사제가 되는 과정도 주교님과 많이 비슷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제의 길로 들어서시는데 난관이 많으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포기하고 부모님의 반대도 무릅쓰고 사제가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이 주교 :
고등학교 졸업 후 사제가 되려고 했는데, 그 때 아버님이 신자가 아니셨기 때문에 아버님의 반대로 신학교를 포기했습니다. 일반 대학에 진학해서, 공부와 가톨릭 학생회 활동 두 가지를 열심히 했지요. 제대 후 대학원을 다니면서 졸업해서 출세하고 뭐 이런 생각을 했었죠. 그래도 주일학교 교사는 항상 했어요. 대학원 시절, 의학과 전자공학을 공부하면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금요일까지 근무하고, 금요일에는 집에 내려와 토요일과 주일에 주일학교 교사하면서 보내고 다시 서울 올라오는 생활이었죠.
 
   1984년도 교황님이 방문하셨을 때, 103위 시성식에 교사들과 함께 갔어요. 새벽 2시에 여의도로 가서 그 미사에 참례했지요. 그때 미사를 참례했는지, 안했는지, 졸다가, 자다가, 하면서 내려왔는데, 그날 오후에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너무 잔가지를 많이 치고 있구나. 이제 잔가지를 좀 쳐내야겠다.’
  그때 군대 다녀오고 대학원 졸업할 즈음이었으니 나이가 좀 되었잖아요. 여전히 아버님은 신자가 아니셨지만, 아버님의 반대에도 내 마음에 흔들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 말씀드렸고, 그 결과 집에서 쫓겨났지요. 그 후 신학교 들어가서 1년 반쯤 되니까 아버님께서 "다시 오너라"하셔서 아버님과 화해했습니다. 그 후 제가 독일로 유학한 다음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세례를 받으셨어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왜 사제의 길을 갔냐고 물어보면, 상황은 설명 할 수 있는데 “왜 그랬냐?”고 하면, 제 스스로도 제가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렇게 하기가 어렵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10. 주교님께서는 한국 천주교 교부학회 창립원년멤버이십니다. 앞으로도 계속 같이 하실 건지?
   이 주교 :
교구에 투신할 생각입니다.
 
11. 평생교육원장 원장님으로 오랫동안 계셨기 때문에, 특히 함께 공부하시던 평신도분들이 많이 기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평소 생각하시던 평신도 교육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주교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이 주교 :
하상신학원 졸업생이 500명이 넘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 정도 숫자라면 엄청난 역할을 할 수 있거든요.
   우리 수원교구는 최덕기 주교님 때부터 계속해서 시노두스 실현과제 두 가지, 즉 ‘소공동체 활성화’ 와 ‘청소년신앙생활 활성화’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요.
   특히 청소년 신앙생활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지금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교리교육을 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냥 본당 대학생들 위주로 교리교사를 뽑아놓으니까, 교리 전달에 어려움이 많이 있거든요. 그런 곳에 그사람들을 쓰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500여 명의 큰 숫자가 우리에게는 큰 힘이 되는데 정작, 그분들이 그런 쪽에 봉사하는 길이 많이 열려있지 않아요.
   그런 부분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런 부분에 대해 가능한 저의 역할이 있다면 기꺼이 시간을 할애하여, 그분들이 좀 더 새로운 방향으로 뭔가를 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생각할 수가 없고요.
 
12. 교부학을 연구하시는 것이 사제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시는지?
이 주교 :
살면 살수록 제가 저도 모르게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흉내내는 것 같아요. 앞선 질문에 답변을 하면서도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거의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그런 모습들이에요. 글쎄요, 저에게는 아우구스티노성인의 모습이 크게 다가옵니다.
   제가 박사 논문을 쓸 때 지도해주신 두 분 교수님께서 저에게 아우구스티노 성인처럼 그런 식으로 제가 살아가도록 가르침을 주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쓴다는 것이 그냥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써야 되는 거예요. 그분들이 그런 것을 가르쳐주시고 유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살아가는 것을 저분들에게 배운 것이 아닌가 합니다.
 
13. 오늘 첫 날을 지내보신 느낌을 간단하게 말씀해 주세요.
   이 주교 :
오늘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최주교님을 만나뵌 일입니다. 최주교님께서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지금도 수원교구를 위해서 뭔가 하시려는 모습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영적인 사제라든지,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던 그것을 제가 내일 살 수 있도록 좋은 말씀 해주셨지요. 그런 사제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14. 주교님께서 신학교에 오래 몸담고 계시면서 느끼신 바가 많을 것 같은데, 사제로서 주교로서 갖춰야할 덕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또한 신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없으신지?
   이 주교 :
우리 신학생들에게 기자들이 취재하기 위해서 뭘 물어본다 하더군요. 뜨끔했어요[웃음] 제가 신학생들에게 악명이 높거든요. 올바른 사제를 만들기 위해 일해야 하는 위치 때문에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웃음]
 저는 신학생들이 정말 신학교에서 정말 어려워도 열심히 신학 안으로 뛰어들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단 한번만이라도 직접 만날 수 있는 그런 생활을 하길 바랍니다.
 성경에서 보면 마귀떼가 들린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쫓아내자 돼지 무리로 뛰어들었던 마귀 이야기 기억나시죠? 그 마귀 들린 사람을 예수님께서 치유해주십니다. 그때 치유 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며 다가오자, 예수님게서는 따라오지 말라하십니다. 다만 말슴하시지요. “너는 이제 네가 그렇게 살아라”. 그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단 한번이라도 예수님을 만나면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신학생들이 그렇게 살길 바랍니다.
 
15. 지금 체감 경기문제라던가, 구제역 등 국민들이 많이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신자들에게 격려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 주교 :
사제로서 단지 위로만을 보내기보다는, 그 어려움을 함께 지고 있는 공동체를 ‘바라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나’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또 무언가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는 공동체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소가, 내 닭이, 내 돼지가...이렇게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을 위해 함께 노력하면 그 효과는 작게는 자기 교회에서부터, 크게는 한국교회, 더 나아 세계로 갈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더 많은 아픔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다...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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