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신부는 화성 건설 당시 정조의 선정에 대해 설명을 덧붙였다. 성곽 건설을 위해 이주민들에게는 3배의 금액을 보상하고, 주민들을 위해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설계를 변경하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또한 정조는 어릴 적 서학(오늘의 성경)을 세 번이나 읽었다 전해지는데, 나 신부는 그의 개혁정치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은 바로 거기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화성성곽은 일정크기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를 1타라고 하며 이 1타 안에는 외부를 살피고 활을 쏘는 등 공격을 할 수 있는 3개의 구멍이 있다. 이를 3구 1타라하는데 이는 삼위일체 신앙과 연결 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였다.
화성만의 독특한 설비로 망루와 적을 공격하는 역할을 했던 서북공심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순례객들은 화서문에 다다랐다. 화서문은 성 안 사형터와 가까워 순교자들의 시신들이 통과한 문으로 시구문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한다.
화서문에서 다시 옛길을 따라 가면 지금은 어느 개신교회인 ‘수원 유수부 사형터’에 이른다. 바로 여기가 박해 때 수많은 순교자들이 처형당했던 곳이다. 다시 촛불을 켜들고 순교자들을 위해 기도를 바친다.
순조가 아버지 정조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사당인 화령전을 지나 이아 터에 이른다.
이아는 화성유수부의 제2청사로 화청관이라고 불렸던 동헌이 있던 곳으로, 재판이 이루어지기도 하여 박해 때는 평민과 천민출신 순교자들을 심문하던 곳으로 수많은 무명순교자들이 여기에서 고문과 박해를 받고 순교한 곳이라 한다.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을 위해 촛불을 들고 기도를 봉헌했다.
화성 행궁 앞 행궁광장은 최근에 간이형옥이 있던 곳으로 밝혀지기도 했다고 전한다. 간이 형옥은 화성행궁에서 심문받았던 양반출신 순교자들을 가두었던 곳으로, 그들에게 마지막 식사를 제공하고 처형하였던 순교 현장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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