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2월 27일 교구 첫 사제서품식이 거행됐다. 단 한 명의 사제가 주님 앞에 엎드려 평생 낮은 자세로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그 후 반세기가 지났다. 수원교구 설정과 함께 사목자의 삶을 시작한 젊은 사제는 이제 후배 사제들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있었다. 교구 설정 이후 초대 사제 최경환 신부의 이야기다. 지난 11일 열린 정자동주교좌성당에서 금경축 축하미사를 앞두고, 최 신부를 찾아갔다.
“사제생활을 되돌아보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아요. 굉장히 짧게 여겨져요. 교구장의 명이 닿는 곳이 곧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으니 특별할 건 아무것도 없었죠.”
사목모토인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루카 1,38)와 마찬가지로 최 신부의 발걸음은 항상 교회의 부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제품을 받고 2년 만에 군종교구로 파견, 베트남전쟁까지 다녀왔고 이후 다시 교구로 돌아와서도 모든 열정을 주님의 일에 쏟아 부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8년 동안 참사위원을 맡았던 것은 물론 여성연합회, 원로사목자 후원회인 성우회, 택시기사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기사사도회의 발족과 성장에도 그가 많은 도움을 줬다.
교구 내 교회 건축에 있어서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다. 수원가톨릭대와 다섯 곳의 성당 건축물을 세우면서 한 번도 빚을 남긴 적이 없다. 이런 일들을 자랑할 법도 하지만 최 신부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 함께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여러 가지 업무에 바쁜 와중에도 그는 사목활동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특히 기초교리를 중요하게 여겨 미사와 구역·반장 월례모임에서도 교리교육을 진행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는 “교육을 하고 나면 신자들이 영적으로 성숙해져서, 사목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해줬다”면서 “덕분에 걱정 하나 없이 사제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교구 발전을 위해서라면 쓴 소리도 가감 없이 이야기하는 최 신부는 인터뷰 말미에 교구의 젊은 사제에 대한 우려와 당부를 잊지 않고 덧붙였다.
“어린이든 어르신이든 신자들에게 반말하는 모습이나 신부답지 않은 옷차림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모습은 아주 걱정스러워요. 특히 사제들이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기보다는 성경에 비추어 현 사회의 잘못을 해석해주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