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봄이 되면서부터 주민들 대표인 ‘7인 회의’와 거의 합의를 이뤄가던 중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또 제기됐다. 납골당과 유해 봉안소 건립으로 우물물 오염이 예상되니 가가호호 수도를 놓아 달라는 이야기였다. 수도사업소에 문의했더니 10km 이상 지선을 별도로 연결하려면 자가 부담을 해야 한다고 했다.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인내의 덕을 쌓아가며 천신만고 끝에 주민들과의 합의가 이루어져 6년 공사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던 와중에 공사장 차량으로 공해와 소음이 젖소유량 생산에 문제가 된다며 검찰에 고발당하기도 했다. 곤혹을 치르는 중에 시청과 경찰에 마을 앞 도로에 쓰레기 투석(담배꽁초, 비닐, 캔 등) 민원이 또 제기돼 1개월 공사 정지 명령이 내려져 손을 놓고 주민들 대표자 회의에 끌려 다니다시피 했다. 농번기라 낮에는 시간이 없다며 새벽이든 한밤중이든 만나자는 제의를 하면 큰 죄를 지은 죄인처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공사가 일부 완성돼(43000기 중 500기) 마무리 공사를 하는 중, 여러 사정으로 사전 납골을 부탁하는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16기를 모셨는데 민원이 또 접수돼 경찰과 검찰 신문기자 합동 조사가 시작됐다.
“신부님! 저희들 입장 좀 생각해 주셔야지요…. 저희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조서를 시작하겠습니다. 성명은요? 생년월일은요? 주민등록번호는요?”
8시간 이상 조서를 받던 심정을 무슨 말로 말할 수 있을까? 밤늦게 사제관으로 돌아오며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어두운 골짜기를 간다하여도…”라고 성가를 부르면서 스스로 마음을 달랬던 8년 세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