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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마당[밀알 하나] 나경환 신부(수원성지 전담·수원대리구 북수동본당 주임)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4-07-10 조회수 : 608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현륭원에 천봉하고 “수원은 이제 나의 제2의 고향이며, 수원사람들은 나의 고향사람들이니라”라고 했다.
 
   정조가 용띠인데, 천봉직후 꿈에 용이 포효하며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태몽을 꿨다. 그리고는 정말 수빈 박씨의 몸에서 태기가 있어 왕세자 이공(순조)을 얻게 됐다. 정조는 ‘여의주를 입에 문 용’ 꿈을 꾼대로 이름을 용주사(龍珠寺)로 정하고 왕실의 원찰을 지어 부친의 묘를 잘 관리하도록 했다.
   그리고 한양을 수호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으며 부친의 묘를 방비하기 위한 목표로 팔달산 기슭에 수원화성 건립을 추진했다. 부친 묘를 이장할 때 정조는 남인파 천주교인 다산 정약용(요한)이 설계한 주교(배다리)를 이용해 한강을 건넜다. 정조는 다산의 재능에 크게 경탄했고 그를 총애했다.
 
   진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 신주를 불태우는 사건이 일어나 조상제사문제로 천주교 지도층 간에 의견이 대립되고 천주교인들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빗발치는 가운데 정조는 다산을 은밀히 불러 수원화성 설계를 명했다.
 
   정조는 다산에게 자신이 좋아하던 버드나무 잎의 모양새로 화성을 설계하도록 했고, 대도회 건설을 통해 정치를 비롯해 다각적인 면에서 국가의 이상을 개혁해 나가고자 했다.
 
   장차 왕세자가 15살이 되면 왕위를 계승해 주고 은퇴해 수원화성으로 내려와 모친 혜경궁홍씨를 모시고 살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호호부실 인인화락(戶戶富實 人人和樂)’이라 이름지었다. 집집마다 빚없이 견실하게 잘 살며, 사람들이 서로 화목하고 기쁘게 산다는 뜻이었다.
 
   1793년, 정조 17년에는 이미 팔달산 아래 1347호의 민가가 들어섰고, 상주인구는 5천명 이상이나 됐다. 그런데 수원화성 건설계획으로 장안동 일대에 들어선 집들이 다시 헐려나갈 상황이었다.
 
   팔달산 위에 올라 산 아래를 내려다보던 정조는 “성을 세 번 구부렸다 폈다 해서라도 장안동 일대의 민가를 모두 성 안으로 수용하라”는 어명을 내린다. 어르신께 효를 실천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려했던 정조의 마음을 헤아려보며 사제로서의 나 자신을 성찰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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