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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소식

교구아들 바오로와 함께 하는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3

작성자 : 홍보전산실 작성일 : 2016-08-24 조회수 : 1164

   6월 24일. 아들과 함께 하는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그 세 번째 여정으로 의정부교구 네 곳 성지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하루에 네 곳의 성지를 돌아봐야하기에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먼저 마재성지로 가서 전대사를 얻기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다른 성지도 돌아보기로 하였다.


   남양주시에 있는 마재성지는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유명한 다산 정약용을 비롯하여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등 4형제가 태어난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가족성지로도 불린다.


   4형제 중 셋째인 정약종은 천주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로, 그리고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 정도로만 기억할 뿐이다. 그러나 순교한 정약종과 그의 아들(장남) 정철상은 절차에 따라 시복되었으며, 그의 아들 정하상과 딸 정정혜가 바로 이곳 마재에서 태어났다. 정약종의 부인이자 정하상과 정정혜의 어머니가 바로 유 체칠리아 성녀이다.
   또한, 정약현의 부인이 이벽의 누이이고 사위가 황사영이며, 정씨 형제의 누이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세례자인 이승훈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면 정씨 형제가 얼마나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들 바오로와 함께 도착한 마재성지는 보슬비가 내려서 그런지 더 아담하고 소박한 산 속 절간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들 바오로도 그런 느낌이 든다면서 아름다운 성지를 돌아보았고 전대사를 얻기 위한 미사 봉헌 후,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쳤다. 성지를 둘러싼 기도 길을 걸으며 많은 생각에 잠긴 바오로를 보면서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주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


   그리고, 40여 분을 달려 양주시에 있는 ‘양주 관아’로 갔다.
   ‘양주 관아’는 의정부교구의 치명 순교성지이며, 1866년 병인박해 때 홍성원 아우구스티노, 김윤오 요한, 권마르타, 김 마리아, 박서방 등 다섯 분이 치명 순교하신 곳이다.


   그런 양주 관아 허허벌판에 순교비만 덩그러니 있었다. 관아 소속 개신교 신자 어르신은 ‘순례 도장’을 찍어주면서, ‘도장도 개인 도장으로 찍어주다가 이제는 관아에서 준 도장으로 찍어준다.’며, 천주교에서는 관심도 없고 너무 소홀하게 관리한다는 불평을 털어놓는다.

   아들 바오로는 개신교 어르신한테 이런 소리 들으니 속상하다고 한다. 나도 속상했다. 속상한 마음을 순교비 앞에서 기도하자 그분들의 순교정신에 속상한 마음이 눈 녹듯 녹았다.


   다음으론 ‘황사영 묘’를 찾아갔는데, 네비게이션이 끝나는 지점에서 40분을 헤매다가 부동산에 들러 여쭈었더니, 2Km를 더 가 동태탕집에 차를 세우고 텃밭으로 돌아가면 나온다고 한다. 1시간을 헤매면서 찾은 ‘황사영 묘’는 가마골 홍복산 자락 아래 비닐하우스에 가려 무덤이 보이지도 않고 외롭게 있었다.


   아들 바오로는 남양성모성지에서는 세계에서 손꼽힐만큼 규모가 큰 성당을 짓는다고 하는데, 순교자 묘 관리가 너무 허술한 것 같다고 말했다. 나도 속상했지만 옛날 우리 선조 순교자들은 더한 고생을 하면서 순교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면서, 지금 너와 나는 땀의 순교를 체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장을 받기 위해 관할 송추성당을 찾아갔지만, 성당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래서 ‘황사영 묘’ 앞에서 인증 삿 사진을 찍었다.


   ‘황사영 묘’는 황사영 알렉시오가 신유박해로 인한 조선 교회의 참상을 알리는 장문의 밀서(황사영 백서)를 작성해 베이징 주교에게 전하려다 발각되어 대역부도죄로 처형된 순교자 묘이다.


   마지막으로 ‘성 남종삼 묘’를 찾았다. 해가 넘어가려는 시간에 찾은 ‘성 남종삼 묘’는 서울대교구 길음동성당 공원묘지 안 산꼭대기에 있었다.


   이곳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 요한 성인과 공주에서 순교한 성인의 부친 남상교 아우구스티노, 진주로 유배되어 순교한 장자 남규희 등 삼대 순교자의 묘소가 있었다.


   차로 가파른 묘지 끝까지 올라갔다가 더 이상 갈 수 없어, 결국 내려서 오르막길을 산 끝까지 올라 묘소 참배를 했다.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전경은 참 아름다웠다. 산바람이 신선하게 불어와 힘든 오늘 하루의 성지 순례를 한 아들 바오로와 나에게 산들산들 손짓으로 쓰다듬어주었다. 따스한 주님의 손길을 느끼고는 눈물이 울컥 나왔다. 힘든 순례인 만큼 피의 순교를 한 선조 순교자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힘든 순례길인만큼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마음을 적셔줄 것이기에 더욱더 의미 있는 순례가 되었다.


   남종삼 요한 순교성인은 1838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103위성인 가운데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이다. 1863년 말경, 러시아가 수시로 우리나라를 침범하면서 통상을 요구하던 차에 남종삼은 방책이라 하여 국내의 프랑스 주교를 통해 한불 수교를 맺고 서양의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물리칠 것을 건의했다. 그리곤 남종삼의 건의에 호의적이었던 대원군은 주교와 신부들과의 만남이 늦어지자 정책을 바꾸어 천주교 탄압을 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남종삼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향년 50세 로 순교하였다.


   힘든 순례 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옛날 순교자들의 삶을 떠올리면서 숙연해졌다. 목숨을 내놓는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순교 선조들이 떠올라서 마음이 벅차올랐다. 아들 바오로도 같은 느낌인지 말이 없다.


박명영 가타리나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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