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마당

알림마당

Home

게시판 > 보기

교구소식

교구아들 바오로와 함께 하는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15

작성자 : 홍보전산실 작성일 : 2016-11-16 조회수 : 1180



   지난 9월 16일. 아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 성지 순례 열다섯 번째로 찾은 곳은 마산교구 ‘ 복자 구한선 묘’와 ‘복자 정찬문 묘’이다.


   추석 명절날 가족이 마산 친정을 찾았다가 지난 번 다 돌아보지 못하고 온 마산교구 ‘복자 구한선 묘’와 ‘복자 정찬문 묘’를 순례하기로 하고는 먼저 함안에 있는 ‘복자 구한선 묘’를 찾았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가운데 우리 가족이 나선 순례 길에 주님이 함께하여 너무 은혜롭고 의미 있는 순례길이 되었다. 먼저 관할 성당인 대산성당을 방문하여 묘소 주소가 맞는지 확인하고 도장도 찍었다.


   대산본당 신자들이 친절하게 안내해 주어서 쉽게 묘소를 찾았다. 순교자 묘에 도착하니 큰 대형십자가가 우리 가족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순교자 묘에는 방명록과 함께 시복시성기도문과 순교자 찬가 자료가 복사 코팅되어 있어서 그것을 보고 가족이 기도하니, 기분이 참 좋았다. 비가 오는 가운데 순교자 묘지를 찾은 우리 가족을 까마귀들과 참새들이 반겨주면서 노래해 주었다. 그 소리가 우리 가족이 바치는 기도 소리와 합쳐져 천상의 소리처럼 아름다웠다.

“오! 주님, 저희 가족이 순교자를 위해 바치는 이 기도를 들어주시고 저희 가족 모두에게 축복을 주소서!  또한 우리가족 모두를 주님께 봉헌합니다.”란 기도가 절로 나왔다. 남편 스테파노와 중 2인 유스티나도 함께 하여 바치는 기도가 ‘주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로 느껴져 감동이 밀려왔다.


   복자 구한선 타대오는 함안군 대산면 출신으로 언제 영세 입교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피난 교우의 후손임이 분명하다. 구한선은 원래 함안 미나리골의 중인 계급 출신으로 신심이 돈독하고 믿음에 충실해 1866년 병인박해 직전에 리델 신부의 복사로 거제도까지 가서 전교활동을 한바 있다. 박해가 본격화 되자 리델 신부는 충청도로 떠나고 구한선은 전주에서 지내다 붙잡혀 감옥에 갇혀 며칠 동안 혹독한 문초를 받다가 결국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자 포졸들이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순교자는 본가로 돌아온 뒤 칠 일만에 장독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나이 23세였다. 순교자의 무덤은 1959년 당시 함안본당 신부였던 제찬규 신부의 노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제찬규 신부는 [치명일기]의 기록을 토대로 순교자의 무덤을 찾으려 애쓰다 대산 공소 회장이었던 윤성학 바오로의 증언을 바탕으로 여러 과정을 거쳐 순교자의 무덤을 확인하게 되어, 그 후 대산본당에서는 순교자의 무덤이 외교인의 묘역 안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현재 위치인 평림리가등산으로 이장하였다.


   다음은 ‘복자 정찬문 묘’를 순례하기 전 관할 성당인 문산성당을 찾았다. 문산성당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만큼 성당이 너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옛날에 미사 시간과 삼종기도 시간을 종으로 알려줬던 그 종탑이 있었다. 그 종의 밧줄을 당겨보니 그 예전 미사의 시작과 삼종기도 시간을 알려주던 사람들의 손길이 느껴져 왔다. 그리고 거룩함이 들었다. 먼저 아름다운 성전 안에 들어가서 주님께 우리 가족을 위한 기도를 바치고는 우아한 성전을 돌아보니, 작은 동굴 속에 성모님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우리가족을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곳에서 성모님께 우리 가족을 주님께 인도해 달라는 간구의 기도를 바치고는 ‘복자 정찬문 묘’를 찾았다.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는 진주시 사봉면 출신으로 신자였던 아내의 권면으로 입교 영세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정찬문은 포졸에게 잡혀 진주 감옥에 갇힌다. 여러 번 심한 문초와 고문을 받았지만 배교하지 않았다. 특히 그가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아기를 등에 업고 주먹밥은 나르던 부인 윤 씨의 격려는 그가 굴하지 않고 순교의 월계관을 쓰기까지 커다란 공헌을 했다. 결국 이듬해인 1867년 1월 25일, 순교자는 매를 많이 맞은 끝에 진주 옥에서 참수 치명한다. 그의 나이 45세 때였다. 죽은 뒤 그의 일가들이 순교자의 시신을 모셔왔는데 머리를 가져오지 못한 채 하체만 장사 지냈다고 한다. 어찌하여 머리를 가져오지 못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순교자의 무덤에 머리가 없다는 사실이 신자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면서 ‘무두’ 묘라 불리게 되었다. 그 후 1946년에 문산성당으로 부임한 서정도 벨라도 신부는 순교자와 무두 묘 이야기를 듣고 무덤을 찾는 작업을 시작하여 1948년 3월 29일 신자들과 정씨 문중 사람들의 노력으로 무덤을 찾게 되었다.


박명영 가타리나 명예기자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