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8일. 내가 초등학교로 문예 수업을 나가는 한 달 여 동안 성지순례를 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렇게 다시 아들 바오로와 함께 성지순례를 갈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한 날이다. 그래서 그런지 대전교구 공세리성당을 향해 비가 오는 가운데 달리는 시간도 너무 행복했다. 차장 밖으로 보이는 자연도 아름다웠고 성지로 향하는 내 발걸음도 즐거웠다. 아침 9시에 안산에서 서해안고속도로로 1시간을 달려 공세리성당에 도착하였다.
공세리성당은 300년이 넘는 국가 보호수를 비롯해, 영화촬영을 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성당이다. 근대 고딕식 건물로 그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성당은 단풍이 예쁘게 물들어 그림 같았다.
비가 내리는 성당에 도착해서 조금 언덕을 올라가니 커다란 성모상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아들 바오로와 난 성모상 앞에서 우리 가족과 또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는 친정 식구들을 위한 기도를 성모님께 전구하였다. 그리고 또 아들 바오로가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성모님께서 막아주시고 치워주시기를 청하는 기도도 바쳤다.
미사를 봉헌하기 전 아들 바오로와 난 십자가의 길을 바쳤다. 비가 내리는 성지는 더욱 운치 있고 하느님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이 되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데 비가 와서 그렇더라도 유독 예수님의 코끝에 빗물이 맺힌 모습이 예수님께서 피땀 흘리시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14처에서 성모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님을 품에 안으신 모습에선 성모님의 코끝에 빗물이 맺혀 꼭 눈물이 맺힌 것처럼 느껴졌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을 안으신 성모님의 처절한 고통의 눈물로 느껴져 더욱더 마음이 아려왔다. 아들 바오로도 신기하게 여기며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아들 바오로가 성지순례 중에 살아계신 하느님 체험을 하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였는데,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느낌이 들었다. 아들 바오로는 말은 없었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전대사를 얻기 위한 미사 중 공세리본당 주임 신부의 강의는 순례자들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었다. “성지순례란? 거룩한 곳에서 순교하신 순교자들의 영성을 본받고 따라 걷고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참된 성지순례란? 드러나는 성당의 건물과 자연의 외형적인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십자가의 길이나 묵주기도 등은 단체로 하지 말고 혼자서 자신만의 기도로 예수님과 대화하며 성지순례 길에서 살아있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을 체험함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으며, “성지순례 중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체험하였다면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서는 체험한 것을 실천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세리성당은 한반도 전체에 걸쳐 아홉 번째로 오래된 성당이자 대전교구 첫 번째 성당이며, 신유박해와 병인박해 때 서른 두 분의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다. 대전교구 최초로 설립된 공세리성당은 역사적으로는 내포 지방의 입구로 해상과 육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포구로 조선 성종 9년부터 공세곶 창고지가 있던 곳이었는데 1897년 그 자리에 구 본당 및 사제관 건물이 들어섰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드비즈 신부가 직접 설계하고 지은 1921년도의 성당이다.
박물관에는 대전교구 최초의 감실과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성녀 루이스 드 마릴락의 유해를 비롯하여, 내포 지방을 중심으로 한 한국 초대 교회의 교우촌 생활과 순교자들의 활동 모습을 뵤여주는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서 아들 바오로와 대화를 나누며 박물관도 돌아보았다. 그리곤 서른 두 분의 순교자 비에서 순교자들을 위한 묵념과 기도를 바쳤다.
이어서 깊은 신심과 세심하리만큼 성실한 수계 생활을 하다 순교한 조윤호 요셉 성인이 태어난 남방재를 찾았다. 지금 한참 보수 공사 중이라 멀리서 바라보고 박해시절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 용감하고 과단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순교한 요셉 성인을 아들 바오로가 닮아가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였다.
충청도에서 최초로 복음이 전해진 곳으로 알려진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 사도의 생가 터 여사울 성지를 찾았다. 뛰어난 학식과 아름다운 품행으로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샀던 순교자처럼 여사울 성지는 아담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의 성지였다. 참 아름답고 예쁘게 꾸며진 성지란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특별한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전교하였던 이존창 사도로 김대건, 최양업 두 신부의 집안도 입교했다고 했다.
또한 신유박해 때 공주 감영에서 순교한 이존창 사도의 생가터인 여사울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신앙공동체였고, 내포 지방 신앙의 출발지이자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신앙의 맥이 이어진 곳이다. 뿐만 아니라 여러 박해를 겪으면서 홍병주 베드로, 홍영주 바오로 두 분의 성인과 두 분의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 김희성 프란치스코 등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순교자의 못자리이다.
여사울성지 이후 아들 바오로와 찾은 성지는 인언민 마르티노 순교자 사적지인 ‘배나드리’ 성지다. 성지를 찾기 전 지리 편을 알고 가기 위해 먼저 관할 삽교성당으로 가서 네비 주소와 성지 도장을 찍고는 ‘배나드리’ 성지를 쉽게 찾았다.
배나드리는 예산군 삽교읍 동남쪽 삽교천 가에 섬처럼 생긴 마을로 도리라고도 부르는데 홍수가 나면 사면이 물바다가 되어 배를 타고 건너 다녔으므로 ‘배나드리’라 하였다. 복자 인언민은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래(현 예산군 삽교읍)에서 태어나 황사영 알렉시오에게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고, 교리를 배운 뒤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였다가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 때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1800년 1월 9일 그의 나이 63세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홍주(홍성)순교성지를 찾았다. 홍주 순교성지는 기록상 212명의 신앙 선조들이 하느님을 증언하다가 목숨을 바친 거룩한 순교성지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분까지 포함한다면 약 700여 명이 넘게 이곳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순교성지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은 분들이 순교한 곳이다. 원시장 베드로는 신해박해 때 홍주 옥에서 세례를 받고 추운 겨울난 동사형으로 순교하였다. 이로써 충청도의 첫 순교자가 탄생되었고, 그 뒤 순교는 계속 이어져 정사 박해 때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신유박해 때 홍주의 백정 황일광 시몬이 순교하였다. 위 4분은 2014년 8월 16일 모두 시복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얻었다.
황일광 시몬은 “백정인 나를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라고 하였다. 그 뒤도 병인박해 때 200여 명이 순교함으로서 우리나라서 두 번째로 큰 성지가 된 것이다. 홍주 순교성지는 예비 신자들이나 신앙심이 약해질 때 새롭게 신앙을 되찾는 은혜로운 성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국 유일하게 열차 순례지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데 천주교 내포 순례길이 잘 조성되어 그 길을 따라 목사의 동헌, 옥 터, 진영장의 동헌, 저잣거리, 참수 터, 생매장 터 등 6 곳을 두루 참배하며 묵상이 가능한 내포의 새로운 순교성지이다. 이곳 홍주(홍성)순교 성지는 늦은 시간에 도착하여서 6곳을 다 돌아보지 못해서 아쉽다. 그래서 시간이 되면 다음번에 한 번 더 순례해 볼 계획이다.
박명영 카타리나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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