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 우리 가족은 제주도 성지순례를 하기 위해 2박 3일 일정으로 제주도를 찾았다. 다음날인 12일 날엔 추자도 섬으로 들어가기 위한 배를 타기 위해서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추자도에 가는 배를 타니, 세월호가 생각나 세월호로 희생된 분들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 추자도에 도착하니, 공소에서 선교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들어오는 신자들을 맞아 황경한 묘소까지 차로 이동해주고 공소 성당까지 데려다 주는 수고를 하고 계셨다.
황경한 묘소는 추자도 섬에서도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원래는 신자들이 힘들게 걸어 올라가야만 하는데, 선교사님이 봉고차로 묘소까지 태워다 주어서 쉽게 묘소에 도착하였다. 묘소에 도착하여 먼저 황경한의 어머니인 정난주 마리아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두고 간 바위를 바라보았다. 그 바위위엔 대형 십자가가 세워져 있어서 멀리서도 잘 보였다. 그 곳을 바라보니 정난주 마리아가 아들을 그곳에 두고 갈 때의 마음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려왔다. 또한 어린 나이에 남겨진 황경한을 걱정하며 평생을 가슴 아프게 보냈을 모성을 생각하니, 가슴이 떨리고 아파왔다.
황경한 묘소를 찾은 우리 가족은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그 옛날 황사영 백서를 전달하여 신자들을 위하고자 하다가 체포되어 가족들이 다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만 했던 슬픔이 전해져서 마음이 서글펐다. 우리 가족도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순교자들의 영성을 본받아 굳건하게 헤쳐 나가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추자도는 제주항에서 북쪽으로 약 45km 떨어진 섬으로 상·하추자, 추포, 횡간도 등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바로 이곳 하추자도에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의 묘소가 있다.
백서 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 알렉시오와 정난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황경한은 신유박해 때 백서 사건으로 부친 황사영이 순교한 후, 어머니 정난주가 제주도로 유배되는 과정에서 하추자도에 남겨지게 되었다. 하추자도에 남겨진 경한은 오씨 성을 가진 한 어부의 손에 거두어졌다. 경한이 추자도에 떨어졌을 때 그가 입고 있던 저고리 동정에서 나온 이름과 생년 월 일에 의해 그가 바로 황경한임을 알게 되었고 오씨의 아들로 키워졌다고 한다. 오씨의 집에서 장성한 경한은 혼인하여 두 아들 건섭과 태섭을 낳았는데, 그 후손이 아직도 추자도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낯설고 외로운 유배지에서 생을 다한 황경한은 사망한 후 예초리 남쪽 산의 중간 산등성이에 묻혔다.
오후 4시 배로 제주도로 나온 우리는 다음날 하루 만에 남은 제주교구 성지를 다 돌기에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늦었지만 나머지 성지 두 군데를 더 돌아보기로 하고는 먼저 황사평 성지를 찾았다.
저녁에 찾은 성지는 평온했다. 커다란 성모상이 팔을 벌려 우리 가족을 반겨주었다. 또한 순교자들의 영성에 놀랍고 무명순교자들의 신앙에 대한 열정에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오늘날에 ‘난 그런 순교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황사평 성지는 1901년 신축교안 때 희생된 무명의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당시 조선 왕실의 재정 확보를 위해 파견되어 온 봉세관이 과다한 조세 징수로 주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고, 여기에 조세 중간 징수 관리자로 이용된 일부 신도들로 인해 교회는 많은 오해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미신 행위 등 신앙에 위배되는 지역 풍습을 시정하는 과정에서 자주 주민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무리한 전교 활동과 왕실 조세 정책에 저항한 민회가 1901년(신축년)에 대정현(모슬포)에서 열리면서 민란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700여 명의 신자들과 양민들이 관덕정 등지에서 피살되었는데, 이것이 ‘신축교안’이라 한다.
신축교안으로 관덕정 등지에서 희생된 교우들의 시신은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별도봉과 화복천 사이 기슭에 옮겨 가매장했는데, 사태가 진정된 후 교회는 별도봉 밑에 묻혀있던 피살된 교인들 가운데 무연고 시신 31기를 이곳 황사평에 이장했으며, 천주교 제주 선교 100주년을 맞아 이 곳을 공원묘지로 새롭게 단장하여 무명 순교자 합장묘를 조성하였다.
다음엔 그 근처에 있는 ‘복자김기량 순교현양비’ 성지를 찾았다. 배를 타고 추자도 섬에 들어갔다 나와 늦은 시간에 찾은 성지였지만 김기량 순교자의 영성이 성큼성큼 다가 왔다.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에 감회가 새로웠다.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제주 함덕리 출신으로 소규모 무역상이었다. 그는 1857년 초 제주 근해를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한 달가량 표류하다가 중국 광동성 해역에서 영국 배에 구조되어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에 인도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조선 신학생 이만돌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운 뒤 1857년 5월 31일 제주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하였다.
그는 제주도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예비신자들의 세례를 위해 그들과 함께 육지에 자주 다녔는데, 여비 마련을 위해 거제도에 갔다가 체포되어 통영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는 장살형을 받아 수없이 많은 곤장을 맞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이듬에 1월에 51세의 나이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는데, 관헌들은 그의 가슴에 대못을 박기까지 하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위원회는 김기량도 ‘하느님의 종’에 선정하여 절차에 따라 시복되었다. 그의 고향 함덕리에 순교 현양비를 세워 그의 신앙과 순교 정신을 기리고 있다.
“사랑의 주님! 저희 가족의 힘든 제주교구의 성지 순례 길에 함께 하여주시고 추자도 섬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 밤늦게까지 성지를 찾아 영성을 본받고자 하는 저희 가족들을 굽어 살피시어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박명영 가타리나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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