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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소식

교구아들 바오로와 함께 하는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19

작성자 : 홍보전산실 작성일 : 2017-01-03 조회수 : 1140

   11월 13일. 우리 가족은 제주도를 떠나기 전 나머지 제주도 성지순례를 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먼저 제주교구 주교좌 중앙본당 관할 지역의 관덕정을 찾았다. 아침 일찍 찾은 관덕정은 본래 조선 세종 때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군사들의 연무장에 세운 정자였는데, 제주 신축교안 때 많은 신자들이 이곳 관덕정에서 민란군에게 처형당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침 일찍 찾은 관덕정은 을씨년스럽다 못해 슬프기만 했다. 입장권 끊는 주변이 천주교인들이 다 처형당해 시체가 너부러져 있던 곳이라고 해 우리가 서 있는 발밑 장소에 순교한 천주교인들의 영성이 다가와 가슴 한 편이 아려왔다. 한편 그분들의 순교정신에 깊은 감명과 존경을 표했고 고개 숙여 묵념했다.


   1886년 한불 조약을 계기로 조선 땅에서 공식적인 박해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는 부패한 관리, 완고한 유생들과 천주교인들과의 충돌이 결국에는 박해라는 양상으로 바뀌었는데, 그 중 하나가 1901년에 발생한 제주도 신축교안이다.


   지방 관리와 기득권을 주장하는 토호세력 등의 결탁으로 유도된 이 사건은 중앙 정부의 새로운 조세 정책에 불만을 가진 백성들의 민란(이재수의 난)으로 출발했으나,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민란군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려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당했다.


   다음으론 ‘새미은총의 동산’을 찾았다. 먼저 우리 가족은 예수님의 공생활 테마 길을 걸으며 묵상하였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예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장면에서 치유의 손길을 느끼고 예수님과 눈을 마주쳤는데,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길에 가슴이 뜨거워지고 촉촉해짐을 느꼈고 체험했다. 또 예수님의 안수를 받고 라자로가 치유되어 동굴에서 나오는 기적도 체험하였다. 그리고는 삼위일체 대성당에서 자비의 희년 폐막 미사를 드렸다. 강론을 기존에 목사였다가 개종하신 분께서 하셨는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 지루하기도 했지만 우리 아들에게 꼭 맞는 말씀을 들려주시어 아들 바오로가 많이 느꼈으리라 생각된다.


   ‘성 이시돌 피정의 집’에 있는 이곳은, 많은 피정과 연수를 위한 신자들뿐만 아니라 비신자들에게도 종교적이고 박애적인 기여를 하고 있는 곳이다. 이 장소의 옛 이름을 딴 ‘새미’ 은총의 동산은 라틴어에서 거룩함, 영혼, 복음, 중개자, 하느님의 모습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는 예수님의 공생활 테마들과 십자가의 길 14처를 동상으로 제작하여 세워 놓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복음 테마 공원이 있다.


   1950년대 후반에 성 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 사제 페트릭 맥글린치(임피제) 신부는 한림본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면서, 그 당시 가난한 제주 농민들을 돕기 위하여 외국의 원조를 얻어 한림읍 금악리에 넓은 목장을 확보하고 성 이시돌 농촌산업개발협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특히 축산업을 발전시켜 제주도뿐 아니라 한국의 목축업에 많은 기여를 했고, 긴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여러 가지 종교사업과 사회사업을 펼쳐 오늘에 이르렀다고 했다.

미사가 너무 늦게 끝나는 바람에 성 이시돌 피정의 집에서 묵주 기도를 바치며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을 걸어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발길을 돌렸다.


   이어 우리 가족이 찾은 성지는 정난주 묘가 있는 대정성지였다. 아담한 성지는 정난주의 깊은 믿음과 풍부한 교양과 학식이 묻어나서 그런지 정겨움과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우리 가족은 정난주 묘 앞에서 먼저 묵념의 시간의 가졌고 주모송을 바쳤다.


   정난주 마리아는 정약현(정약종과 정약용의 맏형)의 장녀로, 15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던 황사영 알렉시오의 부인이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남편 황사영은 조선 교회의 실상을 외부에 알리고자 배론의 토굴에서 중국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작성한다. 하지만 백서는 주교에게 발송되기 전에 발각되었고, 이로 인해 황사영은 순교하게 된다. 또한 그의 아들 황경환은 추자도에, 부인 정난주는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로 귀양을 가게 된다. 정난주는 두 살 난 아들을 품에 안고 귀양길에 올랐으며, 추자도에 이르러 인적이 없는 해안가 갯바위에 아들을 내려놓고 생이별을 해야만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녀는 깊은 믿음과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이웃들의 칭송을 받는 가운데 37년을 살다가 1838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신앙의 증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성 김대건 신부 제주 표착 기념성당인 용수 성지를 방문하였다.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해안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중국 상해항을 출발하여 서해 바닷길로 귀국하다가 표착한 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에서 한국인 최초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같은 해 8월 31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등 일행 13명과 함께 ‘라파엘 호’를 타고 귀국하던 중 큰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가 9월 28일 이곳 용수리 해안에 표착하였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일행은 고국에서의 감격 어린 첫 미사를 용수리 해안에서 봉헌하고, 배를 수리한 후 이곳을 떠나 전라북도 금강 하류 나바위로 상륙하여 귀국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경기도 용인에서 사목 활동을 하다가 1846년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그해 9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25세였다.

천주교 제주교구는 김대건 신부의 선교 열정과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99년 9월 19일 용수리 포구를 성지로 선포하고, 여기에 김대건 신부 제주 표착 기념성당과 기념관을 건립하였으며, 여기에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과 기념관을 건립하였으며,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라파엘 호’를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찾은 용수 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어서 좋았다. 대정성지에서 바치지 못하고 온 십자가의 길을 김대건 신부의 기념관에서 바치니 김대건 신부님의 숨결이 느껴졌다. 비가 오는 가운데 우리가족이 찾은 제주도 마지막 성지 순례 길이 참 은혜로웠다.


   “사랑의 주님! 힘든 제주교구의 성지 순례 길에 저희 가족과 함께 하여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제주도 성지를 찾아 영성을 본받고자 하는 저희 가족들을 굽어 살피시어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박명영 가타리나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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