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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아들 바오로와 함께 하는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21

작성자 : 홍보전산실 작성일 : 2017-02-28 조회수 : 1160



   2월 23일. 아들 바오로와 한국천주교 성지순례 21번 째로 ‘서울대교구 당고개 순교성지, 옛 용산 신학교 성당, 새남터 순교성지’를 순례하였다.


   당고개 순교성지는 아홉 분의 순교 성인과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이신 복자 이성례 마리아가 순교한 곳이다.
   가족들의 간절한 사연을 간직한 성인들이 많은 곳으로, 특히 어린 자식을 거느린 세 어머니인 복자 이성례 마리아는 천주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모성애까지도 초월하여 순교의 월계관을 차지했다. 이곳을 찔레꽃 아픔이 매화꽃 향기로 가득찬 어머니의 성지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그런지 성지를 들어서는 순간 이해인 수녀님의 ‘찔레꽃’이란 시가 반겼다. 참 아름다운 성지란 생각과 함께 11시 미사를 봉헌했다.


   성지담당 이동욱(토마스) 신부는 강론에서, 단테의 서사시 ‘지옥문’에 대한 글을 읽어주었다. “지옥의 특징은 고해소가 없다. 그러기에 성찰과 회개를 하지 못하여 희망이 없다. 또한 자기가 죄가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지낸다. 그리고,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눈이 죄를 지으면 한쪽 눈을 빼고 실명인 상태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했다. 또한 ‘팔이 죄를 지으면 팔을 잘라버리고 불구의 몸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추구해야 한다.’고 선포하셨다.”며, “지금이라도 내가 죄를 짓고 있다면 내손에 들고 있는 망치와 도구로 인간적이지 않는 것을 과감히 잘라버리고 하느님 나라로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안의 신성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와 묵상, 미사 참여로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미사 후, 전시관을 찾았다. 전시관에서는 순교자들 그림과 복자 이성례 마리아가 순교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전시되어 있었다. 봉사자가 설명을 너무 구수하게 해주어 순교자들의 생이 생생하게 걸어 나와 감성을 적셨다. 젖먹이의 죽음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야만 했던 복자 이성례 마리아뿐만 아니라 11남매 중 10남매를 잃어야 했던 손소벽 막달레나, 인간사 그 모든 것보다 신앙을 우선시하며 살았던 최영이 바르바라, 이경이 아가타, 또한 천국을 향한 신앙 교육을 중시한 가문의 아들들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끝까지 말씀에 의지하며 살았던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성직자들을 도와 자신의 삶을 완성한 이문우 요한, 그리고 잘못 들어선 길을 되돌리기 위해 모질게 싸워 참된 회개의 삶을 살았던 권진이 아가타, 외교인 가족들에게 참된 신앙의 마중물이 된 이인덕 마리아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다.


   다음으론 옛 용산 신학교 성당을 찾았다. 커다란 예수님께서 반갑게 바오로와 나를 맞이해 주었다. 옛 신학교라서 그런지 거룩함이 묻어나는 곳이었다.


    조적조 양식으로 명동 주교좌성당과 중림동 약현성당을 설계한 코스트 신부가 설계한 신학교 성당이라 그런지 우아함과 고풍스런 모습이었다. 일반적인 성당과는 달리, 평면 형식을 가진 이 성당은 지형의 특성을 잘 이용하여 지은 아담한 성당으로 현재 성심기념관(구 용산신학교 생활관)과 더불어 사적 제 255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1902년부터 1958년까지 이 성당에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모셨다가 가톨릭 신학대학 이전과 함께 혜화동 신학대학으로 모셔 갔으며, 또한 조선교구 초대교구장이었던 소 부뤼기에르 주교와 제8대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의 유해를 모시기도 했었다.

   옛 용산 신학교 성심성당에서 성체 조배를 하니 당고개 순교성지 미사 때 들은 신부님의 강론이 생각나면서, 아들 바오로가 악습에서 탈피하여 영적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나 또한 알게 모르게 짓고 있는 악습에서 풀려나 하느님만을 알고 사랑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간절히 청했다.

   그리곤 옛 용산신학교 생활관(성심기념관) 전시관을 찾아 전시관 관람을 하였다. 현재 성심수녀회 한국관구 사무실과 성심기념관으로 쓰고 있는 옛 용산신학교 건물은 1892년 배론 예수성심신학교가 용산구 원효로로 이전되면서 코스트 신부에 의해 학교 건물로 지어졌다. 한국전쟁 때 일부 파괴된 건물을 보수하여 사용하다 2007년 완전하게 복원하였고, 옛 용산 신학교 성당과 더불어 사적 제 255호로 지정되었다.


   마지막으로 새남터 순교성지를 찾았다. 새남터 순교성지는 한국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열네 분 가운데 열한 분이 순교한 곳으로, 이 가운데 여덟 분과 교회 지도급 평신도 세 분이 성인에 오른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성지이다.

새남터 순교성지에 도착하니, 커다란 예수님이 팔을 벌려 “어서 오라!” 하며 반겨주었다. 예수님 앞에서 아들 바오로가 빨리 악습에서 탈피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며, 하느님 사랑에 목말라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렸다. 또한 오늘 성지 순례를 통해 하느님을 알아가고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를 바쳤다.


   이곳에 순교의 피가 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부터이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지 6년 만인 1801년 신유박해 때 주문모 신부로 인해 많은 희생자가 생기자 주문모 신부는 자진해서 의금부로 나섰고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에는 조선 제2대 교구장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신부, 성 야고보 샤스탕 정 신부가, 7년 뒤인 1846년 병오박해에는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기해일기’를 작성한 현석문 가롤로가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사제들이 순교했다.

   새남터가 다른 성지와 다른 점은 ‘사제들의 순교지’라는 것이다. 또한,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성인이 군문효수형을 당한 바로 그 장소라는 의미에서 한국 천주교회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새남터 순교성지를 한 바퀴 돌고는 아들 바오로가 천국으로 향하여 새롭게 변화되어 하느님이 원하는 뜻에 합당하게 걸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날씨가 춥고 힘들었지만 희생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바쳤다. 14처까지 다 끝나니 힘들었던 것 다 잊고 기쁨이 마구 솟아올랐다.


“사랑이신 주님, 오늘 하루도 아들바오로랑 저랑 함께 성지순례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성지순례 중에 드렸던 저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어, 꼭 들어주시기를 청합니다.”


박명영 가타리나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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